제목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29주일 2011년 10월 16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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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강점수 | 작성일2011-10-14 | 조회수535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연중 제29주일 2011년 10월 16일
마태 22, 15-21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려라.' 오늘 복음의 결론입니다. 세상의 정권이 하는 일과 종교가 하는 일의 영역이 다르다는 뜻으로 해석하지 말아야 하는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의 이야기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이 헤로데파 사람들과 의논하여 예수님에게 올가미를 씌울 계획이었다는 말로 시작하였습니다. 그 시대 유대아는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예수님이 만일 황제에게 세금을 바쳐야 한다고 말씀하면, 예수님은 조국과 동족을 배반하는 반역자로 비난받을 것입니다. 황제에게 세금을 바치지 말라고 말씀하면, 예수님은 로마 정권의 통치에 저항할 것을 선동하는 정치범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은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라는 모호한 말씀으로써 그들이 만든 함정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지혜로웠다는 사실만 알아들으면, 예수님은 유대인들의 함정에 빠지지 않은 지혜로운 분이고, 그 지혜는 하느님에게서 온 것으로 이해됩니다. 그러면 하느님은 지극히 지혜로운 분이고, 지혜롭지 못한 사람은 하느님과 무관한 사람이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예수님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에 그렇게 지혜롭지는 않았습니다. 그분은 죄가 없으면서도 젊은 나이에 죄인이 되어 십자가에 처형되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을 미워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말합니다. ‘진실하고 하느님의 일을 참되게 가르치며 아무도 꺼리지 않으시는 분’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혜롭고 영특한 분이 아니라, 하느님의 일에 열중하였던 분입니다. 예수님은 재물로써 자기의 미래를 보장하려 하지도 않았고, 일신의 영광을 위해 권력을 지향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율법과 제사 의례의 무거운 짐을 지고 허덕이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그 질곡(桎梏)에서 해방시켜, 하느님 자녀의 삶을 살도록 하는 일에 열중하였습니다. “수고하고 짐을 진 여러분은 모두 내게로 오시오. 그러면 내가 여러분을 쉬게 하겠습니다.” 마태오 복음서(11, 28)가 전하는 그분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유대인들이 생각하듯이, 율법 준수와 제물 봉헌으로만 만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당신의 자비를 실천하는 사람들 안에 살아계십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가르치고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바쳤습니다.
오늘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한 질문은 하느님에 대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하느님에 대한 말이 나올 여지가 없는 질문입니다. 세금을 내어야 하느냐 혹은 내지 말아야 하느냐? 한 개를 선택하여 답하라는 질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런 질문 앞에서도 하느님을 말씀하십니다.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그러나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바치라는 말씀입니다. 사실 모든 것이 하느님의 것입니다. 예수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하느님에 대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어떤 여건에서도 하느님을 가까이 의식하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은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 꿋꿋이’(2디모 4, 2) 하느님을 생각하고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마르코복음서가 전하는 바에 의하면, 어느 날, 길에서 ‘선하신 선생님’이라 부르며 접근하는 사람에게 예수님은 “왜 나를 선하다고 합니까? 하느님 한 분 외에는 아무도 선하지 않습니다.”(10, 16-17)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의 모든 선은 하느님을 근본으로 하고 있다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준수와 성전 의례라는 좁은 종교의 테두리를 넘어 선함이라는 넓은 삶의 이야기 안에 하느님의 일을 보고 계십니다. 복음서들이 전하는 수난사에 보면, 죽음을 앞두고도 예수님이 생각하는 것은 하느님의 뜻입니다. 억울하게 죽임을 당하면서도, 예수님은 당신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도 않았고, 당신을 죽이는 이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시지 말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소서,”(마르 14, 36)라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리고 “아버지, 저 사람들을 용서하소서. 저들은 스스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루가 23, 34)라고도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지배하고 있는 것은 자비로우신 하느님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들의 마음에 살아 계셔야 한다고 믿었습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면, 우리를 지배하는, 하느님이 아닌 다른 것들이 물러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 굶주리는 사람이 행복하다. 우는 사람이 행복하다.’ 예수님의 이 행복 선언은 재물에 대한 욕심에서 해방된 우리의 마음,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욕심에서 자유로워진 우리의 마음, 기쁨과 쾌락의 추구에서 한 걸음 물러난 우리의 마음에 하느님이 계실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그분은 이 세상의 일을 부족하게 누리는 사람을 행복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재물이 나빠서도 아니고, 먹고 마시는 일이 죄가 되어서도 아닙니다. 그것은 사람이 사는 데에 필요한 것들입니다. 그러나 그런 것을 보람으로 삼을 수 없는 우리의 인생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은혜롭게 주신 생명입니다. 선하신 하느님의 일을 실천하며 살라고 베풀어진 우리의 생명입니다.
하느님은 보이지도 않고, 우리가 만져볼 수도 없습니다. 하느님은 물질세계에 속하는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우리의 실천 안에서만 체험되는 분입니다. 우리의 헌신적 봉사가 있는 곳에, 우리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이웃을 위해 나누고 봉사하는 우리의 실천이 있는 곳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그런 나눔과 봉사가 삶의 보람으로 느껴질 때, 하느님은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십니다. 이웃을 위해 기쁨이 되고, 도움이 되겠다는 마음과 실천 안에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우리가 사랑하고 헌신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계십니다.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에게 돌려드리라’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삶을 하느님이 베푸셨고, 그 삶 안에 하느님의 사랑과 헌신이 살아 있게 살아서 그분의 삶이 되게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믿을 교리와 지킬 계명, 그리고 성당의 전례 안에만, 하느님이 계시지 않습니다. 사랑하고 헌신하는 우리의 일상생활 안에 하느님은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리스도 신앙은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게 하는 데에 있습니다. 신앙은 출가하여 모든 것을 버리고 고행(苦行) 할 것을 요구하지도 않습니다. 신앙은 자기 힘이 닿는 대로 자기 이웃을 위해 열린 마음으로 살 것을 요구합니다. 그렇게 열린 마음으로, 이웃을 이해하고 봉사하는 마음 안에 하느님이 함께 계십니다. 그 사실을 알고 그런 실천을 하는 사람이 하느님의 것을 하느님에게 돌려드리는 것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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