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인생의 바다를 건넌 사람들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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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11-10-14 | 조회수403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인생의 바다를 건넌 사람들 - 윤경재
“나의 벗인 너희에게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이상 아무것도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마라.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 너희에게 알려 주겠다. 육신을 죽인 다음 지옥에 던지는 권한을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바로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하느님께서 잊지 않으신다. 더구나 하느님께서는 너희의 머리카락까지 다 세어 두셨다.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루카 12,1-7)
이스라엘 민족의 역사는 우리 한민족의 고난 역사보다 훨씬 길고 강한 억압을 받았습니다. 강대국에 둘러싸인 지정학적 위치로 늘 강한 이민족과 전쟁을 치러야 했습니다. 다윗 왕과 솔로몬 시대 몇 십 년간을 제외하면 늘 긴장과 억압 속에서 지냈습니다. 게다가 국토는 사막 지역에 자리 잡았기에 가뭄과 기근으로 백성들의 고생이 이만저만 심한 게 아니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런 끝없는 고난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런 숙고의 결과를 기록하고 발전시켜 구약 성경이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생각한 고난의 이유와 해결책은 그 시대별로 조금씩 변화하고 더 깊어졌습니다. 간략하게 정리하면 바빌론으로 유배 가서 사제들을 중심으로 하느님과 자신들의 관계를 숙고하기 시작했습니다. 그곳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에 대한 새로운 시각을 자각하게 되었습니다. 자신들만의 민족 신에서 우주를 창조하신 창조주로, 죽어 있는 우상이 아니라 살아계시어 계속 인격적 만남과 관계를 맺으시는 분으로, 원대한 구원계획을 지니시고 온 세계를 구원하시는 구원자로 하느님관이 변하게 되었습니다. 바빌론 유배는 하느님께서 자신들 조상과 맺으신 계약을 망각하여 우상을 섬기고 하느님을 배반한 죄로 말미암아 받는 당연한 공의로운 처사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신학적 조류를 학자들은 신명기적 사상이라고 부릅니다. 그들의 주된 사상은 계약, 자신들의 망각, 우상숭배의 죄, 공의로우신 하느님 등등입니다. 이런 죄에서 회복하기 위해 안식일과 율법을 거룩하게 지키며 마음으로 회개하면 새로운 출애굽이 일어나리라고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과연 제2의 출애굽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고대하던 예루살렘에 귀환하여 보니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습니다. 그 땅에는 이방 민족과 혼잡된 사람들이 자리 잡고 살았으며 오염된 제사가 무너진 성전 터에서 시행되었습니다. 귀환 이후에도 돌아온 자들과 그 땅에 남아있던 자들 계파간의 갈등을 겪었으며 찬란한 꿈이 사라져 버리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습니다. 초라하게나마 성전을 다시 세우고 개혁 조치를 단행하여 구전 전승들을 문서화 하는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그렇다고 시련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근근이 종교적 자치를 유지하던 유다 땅에 그리스문화라는 세찬 파도가 몰려 왔습니다. 선진 문화에 마음을 빼앗긴 많은 사람이 헬레니즘 문화에 경도되기도 했습니다. 이스라엘은 파고를 넘고자 예언서들을 정리하였고 성문서와 지혜문학에 힘을 쏟았습니다. 헬레니즘 문화가 점차 스며들 무렵 결국 시리아 정권이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하는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야훼 신앙을 버리고 제우스신에 경배하지 않으면 학살을 당할 위기에 봉착하였습니다. 일찍이 경험하지 못한 신앙의 대 박해가 벌어졌습니다. 이때 이스라엘은 여러 분파로 갈가리 찢어졌습니다. 헬레니즘에 순응하자는 사람도 있었고, 무력으로 항쟁하는 사람들도 생겼습니다. 동시에 비폭력 무저항주의로 자신들의 신앙을 굳게 지킨 사람도 많았습니다. 그들은 묵시문학이라는 새로운 사조를 일으키며 곧 다가올 메시아를 기다리며 그 어려운 환란의 시기를 견뎌내었습니다. 현세의 고난이 아무리 힘들고 괴로워도 모두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것이니 비록 온전히 이해할 수는 없어도 언젠가는 공의로 심판하실 종말의 전망 아래 꿋꿋하게 이겨내자는 사상이었습니다. 다니엘서를 비롯한 묵시문학이 그런 사조를 대변하며 다니엘서 11,33절에서는 그들을 마스키리암이라 불렀습니다. 그들은 묵시록이라는 새로운 문학 양식을 창조해냈고 사람들에게 교육을 통하여 변화와 승리를 꾀하였습니다. 지혜로서 무모함과 나약함을 이겨낸 것입니다. 인간이 이유 없는 박해를 받을 때 그 고난의 시기를 건너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습니다. 심지어 제 목숨을 끊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험한 고난의 시기를 잘 이겨낸 사람들은 언제나 존재했습니다. 그리고 큰 존경을 받아왔습니다. 현세의 지옥이었던 아우슈비츠에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것을 증명합니다. 빅터 프랭클은 우리에게 무의미 속에서 또 다른 의미를 찾아 환난에서 이기는 길을 제공했습니다. 지혜로 승리를 거둔 것입니다. 베트남 전쟁에서 8년간 포로 생활에서 포기하지 않고 귀환한 스톡데일 장군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그는 모든 것이 합하여 좋게 끝날 것이라는 로마서 8,28절 말씀을 늘 염두에 두고 온갖 고문을 견뎠습니다. 그는 장기 전망과 단기 희망을 적절하게 조화 시켜 매일 매일 지혜롭게 살아냈습니다. 선택의 순간을 맞이했을 때는 우선 복불복 식의 단선적인 무모함을 배격했습니다. 또 자신이 어떤 시기를 상정하여 견뎌내는 순진한 낙관주의도 이겨냈습니다. 다음 성탄절에는 풀려나겠지 하다가 안 되면, 다음 구정에는 풀어주겠지 그래도 안 되면 부활절에는 가족을 만날 수 있을 거야 하고 상상하지 않았습니다. 그 대신 그는 구체적인 저항 방법을 생각해 내었습니다. 고문을 이겨내기 위해 약간의 정보를 실토하는 이정표를 세운다든가 포로들이 어두운 감방에서 고립감에 빠져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박자를 맞추어 벽을 두드려 감방 간에 소식을 전달하는 방법을 고안해 내기도 하였습니다. 막연하고 순진한 낙관주의에 빠진 포로들이 오히려 크게 낙심하여 생명을 잃었다고 스톡데일은 말합니다. 매순간 자신에게 현명하고 이성적 위로를 주되 끝은 반드시 선으로 귀결된다는 신념을 잃지 않았던 사람들만이 지옥 같은 베트콩 포로 생활을 이겨내었다고 말했습니다. 스톡데일이야 말로 현대판 마스키리암이라 부를 수 있겠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는 내용도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진정 두려워해야 할 존재가 하느님이심을 알고 그분께 모든 것을 의탁함으로써 현세의 고난을 이겨낼 것을 주문하십니다. 어떤 극한 순간에서도 하느님께 대한 희망과 신뢰로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으려 했던 이들이 보여준 생명에의 의지는 고난의 바다처럼 보이는 인생이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지 분명히 확인시켜 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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