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녁 식탁에서 있었던 일이다. 일본 카나메 신부가 이발을 하고 와서 말쑥한 모습으로 식탁에 나타나자 화제는 자연스럽게 이발에 관한 이야기가 계속 됐다.
멕시코 출신의 다비데 신부가 얼마주고 머리를 잘랐는지를 묻자 카나메 신부는 15유로를 줬다고 했다. 다비데 신부가 같은 곳에서 10유로 주고 머리를 잘랐다고 하자 카나메 신부는 알 수 없다는 듯이 ‘왜 누구는 15유로 받고 누구는 10유로 받는 거야? 다음번에 가면 따져봐야겠네’라며 불평을 했다.
내가 아무 뜻 없이 농담으로 ‘그건 맞어. 비록 카나메 신부의 머리숱이 다비데 신부보다 좀 많긴 하지만 그래도 이발 요금은 똑 같아야지. 머리숱이 좀 많다고 5유로나 더 받으면 그건 정의가 아니지’라고 했더니 카나메 신부가 최신부가 옳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랬더니 조용히 같은 식탁에서 식사를 하던 PIME(교황청 외방선교회) 총장 신부님이 ‘그래, 난 6유로 주고 깎는다. 그래서 불만있냐? 나는 앉으면 5분이면 끝나고 너네 젊은 신부들은 10분, 20분 걸리는데도 똑같이 돈 내야 돼?’하시며 젊은 놈들 논리를 이해 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셨다.
옛날 프란치스코 회원처럼 머리 뒤쪽에만 조금 머리가 있는 총장신부님의 그 한마디에 우리는 ‘지당하신 말씀입니다’라는 동의의 표정을 정성스레 지으며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고 쥐 죽은 듯 밥만 먹고 있었다.
누군가 정의와 평등이라는 개념을 오늘 날 우리가 살고 있는 사회에서 생각하고 요구하는 대로 ‘누구에게나 각자 능력껏 일 한 만큼의 몫을 분배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복음서에서 접할 수 있는 주님의 ‘정의와 평등’의 개념과는 한참 멀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세계 곳곳의 신부님들과 함께 살아가다 보면 사람들이 태어나면서부터 노출되는 ‘상황’이라는 것이 전혀 다르다는 것을 잘 느낄 수 있다. ‘동등한 기회’아래에서 라면 각자가 일 한 만큼 성과대로 나누는 것이 정의라고 하겠지만 똑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노출되는 조건부터가 하늘과 땅과 같은 차이에 있다면 좀 다르지 않을까? 그게 인생이라고 한다면 너무나 어쩔 수 없이 비겁한 우리들 아닐까?
저 아시아에서, 아프리카에서 혹은 남미대륙에서 빼앗길 대로 다 빼앗긴 사람들과 넘치도록 다 빼앗고 넘치도록 가진 사람들이 이제부터 똑같은 조건에서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누자는 것이 정의이고 평등일까?
정의의 올바른 개념을 ‘원래의 몫을 원래의 주인에게 돌려준다’는 것으로, 또 평등의 올바른 개념을 ‘하늘 아래 똑같은 인간’으로 이해한다면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무조건적이고 서양 중심적인 자본주의의 정의와 평등의 논리는 적어도 우리들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시 생각되어져야 한다.
복음서에서 볼 수 있는 주님의 정의와 평등은 애초부터 이런 것과는 다르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로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할지 모르지만 주님의 포도밭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세상과는 많이 다르다. 그래서 적어도 그리스도인이라 자처하는 우리들의 나눔은 보다 적극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우리들 삶 속에서 실천되어져야만 한다.
“그 들은 돈을 받고 주인에게 투덜거리며 ‘막판에 와서 한 시간 밖에 일하지 않은 저 사람들을 온종일 뙤약볕 밑에서 수고한 우리들과 똑같이 대우하십니까’하고 따졌다. 그러자 주인은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을 보고 ‘내가 당신에게 잘못한 것이 무엇이오? 당신은 나와 품삯을 한 데나리온으로 정하지 않았소? 당신의 품삯이나 가지고 가시오. 나는 이 마지막 사람에게도 당신에게 준만큼의 삯을 주기로 한 것이오’하고 말하였다.”(마태20,11-14)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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