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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우리시대의 예수, 도대체 누구인가 (담아온 글)
작성자장홍주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18 조회수447 추천수3 반대(0) 신고
우리시대의 예수, 도대체 누구인가
 
2011년 10월 17일 (월) 22:13:09 정양모 .
 

   
▲정양모 신부 "1992년 우연히 다석 유영모(1890-1981)에 관한 책을 읽고서 <다석강의> <다석 마지막 강의> <다석 일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 공부의 연장으로 본다"고 말했다.

우리 집안은 증조부 때 천주교신앙을 받아들였다.
1935년 음력 11월 6일에 태어난 나는 태어난지 3일 만에 공소회장 큰 할아버지로부터 바오로라는 영명으로 세례를 받았으니 나는 숙명적으로 천주교인이 되었다. 나는 이를 고맙게 여긴다.

1961-1970년 프랑스, 독일, 이스라엘에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하고 늘 감사한다. 1970년-2001년 광주 가톨릭대, 서강대, 성공회대에서 후학들을 가르치면서 예수그리스도 연구를 계속한 것을 천행으로 여기고 사은의 정을 품는다. 1992년 우연히 다석 유영모(1890-1981)에 관한 책을 읽고서 <다석강의> <다석 마지막 강의> <다석 일지> 공부를 하고 있는데, 나는 이를 예수 그리스도 공부의 연장으로 본다. 2012년 <다석 시조 풀이>를 펴낼 생각이다. 이렇게 다석 공부가 일단락되면 본격적으로 다시 예수그리스도 공부로 돌아갈 셈이다.

유대인 예수의 하느님나라 운동, 예수 사후에 예수 그리스도를 그리스-로마 세계에 전파한 사람들의 신앙관을 담은 신약성경, 그리고 2천년 동안 서구인들이 쌓은 신앙과 신학 전통을 수용하는 한편, 그 전통을 내 나름대로 이해하려고 애쓴다. 옛 글을 즐기면서 그 글의 까닭(故)을 묻는다(溫故而知新-논어, 위정, 11).

내가 서구 언어로 이 글을 쓴다면 학계의 견해를 길게 소개하고 자신의 입장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발설 근거와 변명을 늘어놓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와는 달리 나는 신약학과 신학의 연구 성과를 이 글 밑바탕에 깔겠지만, 일체 번거로운 토론은 제쳐두고 내가 믿고 생각하는 바를 편안한 마음으로(sine ira et odio) 적어내려 가고자 한다. 정부인 안동장씨(貞夫人 安東張氏 1598-1680)의 시 한 수를 빌려 내 심정을 드러낸다(이혜수․정하영 역편, <한국고전여성문학의 세계, 한시편>, 이화여대 출판부, 1998,65쪽).

성인을 노래함 聖人吟
성인과 같은 때에 나지 않아서 不生聖人時
성인의 모습 뵐 수가 없지만 不見聖人面
성인의 말씀은 들을 수 있으니 聖人言可聞
성인의 마음은 볼 수 있네 聖人心可見

1. 예수님의 아빠 하느님

   
▲ 정양모 신부.

예수님의 설교 주제가 Basileia tou theou(마르 1,15)임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을 직역하면 하느님의 왕정이고, 공간적 의미가 들어있는 드문 경우에는 하느님의 왕국이다. 신약성경 번역을 보면 하느님의 왕정과 왕국을 뭉뚱그려 흔히 ‘하느님의 나라’라고 번역한다. 임금들이 통치하는 시대는 지났으니 만큼 왕정이나 왕국은 한물 간 표현이다. 그럼 순 우리말로 ‘하느님의 다스림’이라고 할까? 민주화시대에 어감이 좋지 않다. 궁여지책으로 예수의 설교 주제를 ‘하느님의 베푸심․선하심․돌보심’이라고 부르겠다. 예수께서는 여러 비유로 썩 잘 이를 설명했다.

선한 포도원주인의 비유(마태 20,1-16)

선한 포도원주인의 비유부터 살펴보라. 우선 포도수확 이야기 자체를 이해할 일이다. 이스라엘에선 예나 이제나 10월 말경 포도 수확 철이 되면 일손이 많이 필요하다. 포도원 주인은 오전 6․9․12시, 그리고 오후 3․5시에 인력시장에 가서 일꾼들을 고용한다. 얼마나 일손이 필요했던지 오후 5시에 마지막으로 또 일꾼을 고용한다. 오후 6시 일몰 때 일당을 지불하는데 맨 나중에 와서 한 시간 일한 일꾼부터 시작해서 일당을 지불하라고 주인이 명한다.

당시 노동자의 일당이 로마 은전 한 데나리온이었으니 한 시간 일한 일꾼은 12분의 1 데나리온을 받는 게 정상이었다. 그런데 주인은 아주 뜻밖에도 하루치 일당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그리고 새벽 6시에 고용되어 12시간 일한 사람에게도 똑 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

포도원 주인의 처사는 매우 파격적이다. 일한 만큼 예우한 게 아니라, 오후 5시까지 고용되지 못한 일꾼의 딱한 처지를 불쌍히 여겼던 것이다. 이들은 다른 일꾼들보다 노약했거나 지능이 부족해서 저녁때까지 팔려가지 못했을 것이다. 이들에게도 가족이 딸려 있을 것이고, 가장이 한 데나리온을 벌어 와야 하루 먹거리를 해결할 수 있었겠다. 포도원의 선한 주인은 일한 양보다 가련한 노동자의 처지를 동정했다고 하겠다. 하느님은 바로 이런 분이시라는 뜻이다.

박완서는 이 비유의 핵심을 딱 짚었다. “하느님의 저울은 인간의 지혜가 만든 어떤 정밀한 저울보다도 틀림없다”(<성서와 함께>, 1990년 8월호)

선한 아버지의 비유(루가 15,11-32)

어떤 부자에게 아들이 둘이 있었다. 아버지는 율법에 따라서 장남에게 재산의 3분의2를, 차남에게 3분의1을 나누어 주었다. 차남은 사창가에서 재산을 몽땅 날리고 알거지가 되었다. 조선 말기의 가정소설 <이춘풍전>을 떠올리게 된다. 차남은 너무 배가 고파서 겨우 얻은 일자리가 돼지를 치는 일이었다.

유대인들은 예나 이제나 돼지를 가장 불결한 짐승으로 여겨 금기식품 1호로 돼지고기를 꼽는 사실을 감안할 때, 저 차남은 절망의 나락에 빠졌다고 하겠다. 돼지먹이 가룹(그리스어로 Keration, 아랍어로 Kharrub) 꼬투리로나마 배를 채울까 했지만, 돼지농장 주인은 그것도 허락하지 않았다. 그제야 차남은 정신을 차리고 아버지 집으로 돌아갔다.

“차남이 아직 멀리 있었는데, 아버지는 그를 알아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서 그의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 아버지는 종들에게 일렀다 ‘어서 제일 좋은 옷을 가져다가 입히고 손에는 가락지를 끼워주고 발에는 신을 신겨주어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내다 잡아라…’ 그래서 즐거운 잔치를 벌였다.”(20-24절).

비유 이야기는 계속된다. 들에서 돌아온 장남이 이 광경을 보고 아버지께 불평을 하니까 아버지는 이렇게 타일렀다. “얘야,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은 다 너의 것이다. 그런데 너의 아우는 죽었다가 살아났고, 내가 잃었다가 찾았으니 즐기고 기뻐해야 한다.”(31-32절).

이제 선한 아버지의 비유에 담긴 뜻을 살필 차례다.
- 하느님 아버지를 떠난 인간의 모습은 저 탕자처럼 비참하다는 말씀이다. 탕자가 사는 길은 아버지께로 되돌아가는 것 밖에 없다. 돌아섬, 되돌아섬이 회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동사 슙, 명사 터슈바)의 원래 뜻이다. 하느님을 등진 인간이 하느님께로 되돌아서는 방향전환․전향․회귀가 회개의 히브리적 의미다. 유대교 철학자 마르틴 부버(1878-1965)는 동유럽 랍비들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돌아섬의 뜻을 생생하게 밝혔다(<인간의 길>, 분도, 1977, 39-45쪽).

- 비유의 역점은 회개하는 죄인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하느님의 선하심에 있다. 아울러 하느님의 선하심을 이해하지 못하는 인간의 좁쌀 한 톨만도 못한 편협함을 폭로한다.(루가 15,25-30; 참조 마태 20,10-15).

- 유럽 화가들은 탕자의 귀가를 그리곤 했는데 렘브란트(1606-1669)가 죽기 일 년쯤 전에 그린 명화(에르미타주 박물관 소장)가 가장 빼어나다. 눈이 거의 감기다시피한 연로한 아버지가 붉은 망토를 걸치고, 무릎을 꿇은 차남의 등을 어루만지는데, 한손은 남자 손이지만 또 한 손은 여자 손이다! 무슨 뜻일까? 부정과 모정을 다해서 너를 사랑한다는 뜻이 담긴 상징적 손 모양새다.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와 진주 장사꾼의 비유(마태 13,44-46)

예수께서 여기 두 가지 비유를 한꺼번에 발설 하셨으리라는 학설과, 예수께서 따로 따로 발설하셨는데 마태오가 함께 모아서 쌍비유가 되었으리라는 학설이 맞서고 있는데, 두 비유의 뜻을 풀이하는 데는 별 차이가 없다.

우선, 밭에 숨겨진 보물의 비유 이야기부터 살펴보겠다. 소작농이나 품꾼이 남의 밭을 갈다가 우연히 보물단지를 발견하다. 단지를 묻어두고 비싼 값을 치루고라도 그 밭을 사서 보물을 차지하고야만다는 이야기다. 진주 장사꾼은 우연히 값진 진주를 발견한 게 아니고 최상급 진주를 애써 찾아 나섰다가 발견하고 비싼 값으로 사들인다.

쌍비유의 뜻을 찾을 차례다. 아무래도 쌍비유는 예수의 ‘신상발언’인 것 같다. 예수께서 고향을 등지고 직업을 팽개치고 어머니 공양과 동생들 부양을 저버린 까닭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베푸심과 돌보심에 매료되셨기 때문이었다. 그 사실을 쌍비유로 말씀하셨다고 여겨진다.

[ 1항 요약 ]

예수께서는 하느님을 점잖게 아버지,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지 않고 “아빠”라고 부르신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마르 14,36). 그 영향으로 1세기 그리스도인들도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다(갈라 4,6;로마 8,15). “아빠”는 본디 어린아이의 말(소아어)이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서도 아버지를 정겹게 아빠라고 부르는 수도 있는데, 부자간에 정이 넘치는 호칭임에 틀림없다.

괴팅겐 대학의 석학 요아킴 예레미아스는 예수의 하느님 호칭 “아빠”를 평생 연구한 결과, 장구한 유대교 역사상 예수께서 처음으로 하느님을 아빠라고 불렀고, 그 영향으로 그리스도인들이 기도할 때 그런 신칭을 썼다는 사실을 밝혔다. 에레미아스 교수에게서 직접들은 감동적인 이야기다. 자신의 연구결과의 진위를 가리려고 유대교 랍비들에게, 하느님을 아빠라고 부르면서 기도하면 좋지 않겠느냐고 했더니, 기절초풍하면서 무례한지고, 무엄한 지고라고, 하면서 거부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하느님이 ‘아빠’시라면 예수 자신은 하느님 앞에서 ‘아가’라는 의식을 지니셨겠다. 예수께서 어린이 영성을 부르짖은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마르 10,13-16). 이에 대한 논의로는, 졸저(<나는 다석을 이렇게 본다>, 두레, 2009, 167-178쪽)를 보라. 예수님의 영성은 부자유친 영성이다. 우리가 예수님처럼 하느님을 아빠로 체험한다면 최상이겠지만, 적어도 예수님의 체험을 자기 것으로 삼는 추체험(追體驗)이 필요하다.

   
▲정양모 신부는 "예수는 하느님의 선하심과 베푸심과 돌보심에 푹 빠져 인간에 대한 연민이 넘친다"고 말한다.

2. 하느님의 아들 예수

하느님의 선하심과 베푸심과 돌보심에 푹 빠져 사신 예수시라, 인간에 대한 연민이 넘친다. 특히, 사람이면서 사람대접을 못 받고 산 세리들과 죄인들을 감싸신 말씀들과 행적들은 감동을 자아낸다.

바리사이와 세리의 기도 예화(루가 18,9-14)

바리사이는 613가지 계율을 다 지키기로 작심한 평신도들로서 예수시대에 그 수효는 6천 명쯤 되었다. 여기서 세리는 가파르나움, 예리고 등 국경에서 관세를 거두어들이는 세관원으로서 세리들은 직업상 죄인 취급을 받았다. 그 까닭인즉, 매일 외국인들과 외국 수입품목과 접촉했기 때문이요, 법정 액수보다 많이 징세해서 착복하기 일쑤였기 때문이다. 요즘도 세무서와 세관은 이권부서로 물의가 잦은 편이다.

바리사이와 세리가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서 기도하는 모습을 보자. 바리사이는 “자기 자신을 향하여” 기도했다고 했으니(파피루스 75․바티칸 사본), 바리사이는 하느님과 대화한 것이 아니고 결국 독백을 한 셈이다. 그리고 자기 자랑을 잔뜩 늘어놓고 나서, 자신은 강도, 불의, 간통을 한 인간들과 질적으로 다를뿐더러, 성전 마당 저 멀리서 머리를 쳐들지도 못하고 가슴을 치고 있는 세리와는 비교할 수 없는 의인으로 자처한다. 바리사이가 뻐기는 꼴을 보라.

일반 유대인들은 1년에 단 하루 속죄의 날에 단식한데 비해서 바리사이들은 매주 월요일과 목요일에 단식했다(열두 사도들의 가르침 8,1). 그리고 일반 유대인들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기름을 생산하면 십일조를 바쳤는데(신명 14,22-23), 바리사이들은 모든 수입의 십일조를 바쳤다. 이들은 박하와 시라와 소회향 등 향신료를 생산해도 십일조를 바쳤다(마태 23,23). 심지어 시장에서 물품을 구입하면 또 십일조를 바쳤다. 혹시라도 물품 생산자가 십일조를 바치지 않았을 세라 염려한 나머지, 생산자 대신 구입자로서 십일조를 바쳤던 것이다.

예화에 대한 예수님의 결론은 파격이다.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바리사이가 아니라 세리가 의롭게 되어 자기 집으로 내려갔다.”(14a절).

예리고 세관장 자캐오 이야기(루가 19, 1-10)

예리고는 요르단강 서안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라 세관이 있었고 자캐오는 그곳 세관장이었다. 이야기 줄거리는 이렇다. 예수께서 예리고를 지나가신다는 소문을 듣고 자캐오는 예수님 모습을 보고 싶었지만 키가 너무 작아서 볼 수가 없었다. 궁즉통이라,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가서 예수님을 내려다보는데, 예수께서 쳐다보시고 뜻밖의 말씀을 하셨다.

“자캐오 씨, 빨리 내려오시오. 오늘 내가 당신 집에 머물겠소.”(5절). 자캐오는 너무도 황송한 나머지 회개하기로 작심하고 예수께 이런 말씀을 드렸다. “보십시오. 주님, 제 재산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남의 것을 등쳐먹은 적이 있다면 네 갑절로 갚아주겠습니다.”(8절). 이에 예수께서 화답하셨다. “오늘 이 집에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실상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아들입니다.”(9절).

간음하다가 잡혀온 여인 이야기(요한 8,1-11)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이, 간음하다가 들킨 부인을 성전에 계신 예수께 끌고 와서 고약한 질문을 던졌다. “율법에서 모세는, 간음한 여자를 돌로 쳐 죽이라고 우리에게 명했습니다. 당신은 뭐라고 하시겠습니까?(5절). 예수께서 어떻게 대답하든 곤경에 처할 수밖에 없는 아주 고약한 물음이다.

율법(신명기 22장 23-24절)에 따라서, 돌로 쳐 죽이라고 답변하셨다면, 당시 로마 총독만 극형을 내릴 수 있었던 로마제국의 법률을 어기는 셈이요, 예수께서 설파한 하느님 자비의 복음에 흠집을 내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정반대로, 용서해 주라고 답변하셨다면 유대교 율법을 어기는 것이었다.

예수께서 가타부타 대답 하지 않고, “몸을 굽혀 땅바닥에 무엇인가 쓰셨다.”(8절). 무엇을 쓰셨을까? 알 수 없지만 한가지만은 분명하다. 내가 너희들 술수에 말려들 줄 알고, 어림 반푼어치도 없지, 하는 태도였던 것이다. 그러다가 던진 한마디 말씀이 비수 같았다. “당신들 가운데서 죄 없는 사람이 먼저 이 여자에게 돌을 던지시오.” 이 말씀을 듣고 어느 누가 먼저 돌을 들 수 있겠나?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반응이 걸작이다. “듣고 있던 사람들은 나이 많은 이들부터 시작하여 하나하나 떠나가 버리고 예수만 남고 여자는 그대로 있었다.”(9절). 죄가 별건가, 사는 게 죄지, 라고 한 어느 노인의 체념 섞인 말이 떠오른다. 《장자》천지편에 나오는 “오래 살면 치욕스러운 일이 많다”(壽則多辱)는 명구도 생각난다.

이야기의 백미는 이야기 끝에 달린 예수님의 말씀이다. “나는 부인을 단죄하지 않습니다. 가시오.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를 짓지 마시오.”(11절). 과거를 묻지 않겠다. 새 출발하라는 복음이다! 박태식 신부는 이 단락을 쉽고 분명하고 구수하게 풀이했다. 관심 있는 이는 (<예수의 논쟁사화>, 박태식, 늘봄, 2009, 86-93쪽)을 일독하기 바란다.

[ 2항 요약 ]

세관원들은 국경 세관에서 늘 이방인들과 상종하고 외국 물품을 다룬 까닭에 항상 불결 상태에서 산다고 여겨졌다. 거기에다 정액보다 더 받아서 폭리를 취한다고 해서 사기꾼으로 통했다. 그래서 회당 예배와 성전 제사에 참석할 수 없었고, 범죄 현장을 목격했더라도 유대교 법정에 증인으로 출석할 수도 없었다. 예수 당시 세리는 조선조의 백정, 광대보다 더 고약한 천민이었다. 요즘 세상에서 예를 든다면 인도의 불가촉천민(달리트) 취급을 받았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세리들과 수시로 사귀고 함께 어울려 식사하셨기 때문에(마르 2,13-17). 심한 욕을 얻어먹었다. “인자가 와서 먹고 마시니까, 〈보아라.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들과 죄인들의 친구로구나〉라고 말합니다.”(마태 11,19=루가 7,34). 이런 쌍욕을 듣고 가만히 계실 예수시겠느냐? 폭탄선언을 하시지. “진실히 여러분에게 이르거니와, 세리들과 창녀들이 바리사이들과 율사 여러분보다 앞서 하느님 나라로 들어갈 것입니다.”(마태 21,31).

예수께서 안식일보다 사람의 평안을 앞세운 사실(마르 1,21-28․29-31; 3,1-6; 루가 13,10-17; 14,1-6; 요한 5,1-18; 9,1-41), 제사보다 자비를 중시한 사실(마태 9,13), 정결례보다 마음의 순결을 중시한 사실(마르 7,1-23)도 눈여겨보라!

   
▲정양모 신부는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값을 하자면 별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익히고 닮아야 한다"고 전한다.

3. 우리는 그리스도인

천주, 천주교인이라는 낱말은 중국에서 전도한 마태오 리치(1552-1610)와 미켈 루지에리(1547-1607)가 만들어낸 신조어다. 가톨릭이라는 낱말은 서기 110년경 로마에서 맹수형으로 순교한, 안티오키아 주교 이냐시오스가 만들어낸 말이다. 이보다 훨씬 앞서 시리아의 수도 안티오키아선 그리스도인이라는 신조어가 생겨났다(사도 11,26).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 값을 하자면 별 수 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익히고 닮아야 한다. 하느님께 가는데 예수코스를 따를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익히고 닮아야할 규범들을 복음서에서 예시코자 한다.

사랑의 쌍계명(마르 12,28-34)

유대교는 계율이 성한 종교다. 613가지 계율 가운데서 248가지는 명령이고 365가지는 금령이다. 유대교 역사에서 이 잡다한 계율의 기본 원리를 찾으려는 노력이 더러 있었다(정양모 역주, <마르코 복음서>, 분도, 1981, 139-141쪽). 예수께서는 잡다한 계율들을 하느님 사랑과 이웃사랑으로 환원시키셨다.

다석 유영모(1880-1981)는 유가의 표현을 빌려 하느님 과 우리의 인연을 부자유친이라고 했다. 불가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부모가 없는 사고무친이고, 유가는 부자유친을 혈연관계에 국한시킨데 비해서, 예수는 부자유친을 영원한 차원에까지 확대해석했다고 풀이했다.

“이웃사랑”은 글자 그대로 “이웃부터 사랑하라”는 말씀이다. 나날이 상대하는 이웃을 소홀히 하고 인류애를 부르짖는 것은 공허하기 십상이다. 그리고 “사랑”이라는 말이 천박하게 들리면 연민이라 해도 좋다. 이웃 사랑은 이웃에 대한 연민의 정에서 시작하는 까닭이다.

산상수훈의 대립명제들(마태 5,21-48)

산상수훈(마태 5-7장) 앞부분에 여섯 가지 대립명제(5,21-48)가 나온다. 그 짜임새를 보면 하나같이 구약성경 말씀을 인용한 다음에, 그 말씀을 심화하거나 폐기하는 예수님 말씀을 덧붙인다. 그러니까 구약성경 말씀과 예수님 말씀이 대립되는 형식이다. 지금의 대립명제 형식은 마태오 복음작가가 만들었지만, 그 내용은 예수님의 뜻을 반영한다고 본다.

바리사이들과 율사들의 계율뿐 아니라 구약성경의 말씀까지 심화가거나 폐기하는 대립 명제에는 예수님의 전권의식이 엿보인다. 예수께서 경천애인(敬天愛人)을 구체적으로 어떻게 생각하셨는지를 생생히 엿볼 수 있는 귀하디귀한 사례들이다. 단, 예수님의 요구가 너무도 파격적이어서, 곧이곧대로 지킬 수 있다, 지킬 수 없다, 논란이 계속되고 있는 형편이다.

자구대로 지킬 수는 없겠지만 경천애인의 구체적 방향을 제시했다는 뜻에서 방향 규범이라 하겠다. 당장에 다 지킬 수는 없겠지만 점점 커나갈 성장규범이라 하겠다. 예수께서는 방향규범, 성장규범을 강조코자 언어충격용법을 쓰셨다고 여겨진다. 이제 여섯 가지 대립 명제들 가운데서 세 가지만 골라서 약술코자 한다.

성내지도 말라(마태 5,21-26)

십계명에는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이 있다(출애 20,13; 신명 5,17). 예수께서는 살인 이전에 분노하는 것조차 금하셨다. 분노하면 쉽게 입에서 튀어나오는 “바보” “천치”라는 욕설조차 금하셨다. 분노와 욕설 따위도 이웃사랑을 금가게 하는 까닭이다. 예수께서 이웃사랑을 거스르는 분노와 욕설을 금하셨지, 의분과 정당한 비판까지 단죄하셨다고 볼 수는 없겠다.

맹세하지 말라(마태 5,33-37절)

유대인들은 맹세를 자주 했는데, 맹세는 자기 말의 신빙성을 강조하려고 하느님을 증인으로 내세우는 말이다. 맹세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지난 일을 두고 맹세하는 과거 지향적, 단정적 맹세가 있고(레위 19,12), 앞으로 무슨 선행을 하겠다고 맹세하는 미래지향적, 서약 적 맹세가 있다(민수 30,3). 예수께서 보시기에, 사람들이 서로 불신하기 때문에 맹세하곤 하는 것이니, 모름지기 당신 제자들은 절대로 맹세하지 말아야 한다고 하셨다. 그럼 사도 바울로가 시도 때도 없이 유대인 관행대로 맹세한 사실은 어떻게 이해해야 하나? 그는 예수님의 직제자가 아니라서 예수님의 맹세 금령을 못 들었다고 한다면 변명이 되겠나?

어쨌거나 맹세 금령 다음에 예수께서는 당신 제자들에게 참 말만 하라고 당부하셨다. “여러분은 말을 할 때 〈예〉할 것은 〈예〉라고만 하고, 〈아니오〉할 것은〈아니오〉라고만 하시오. 여기에 더 보태는 것은 악한 자(=사탄)에게서 나오는 것입니다.”(37절). 그러나 세상을 살다보면 참말만 하고 살 수 없는 게 우리네 인생이다.

강남 성모병원에 입원한 노사제가 주치의에게, 앞으로 얼마나 더 살 수 있겠는지 솔직히 알려달라고 간청했겠다. 주치의가 노사제의 굳은 신심을 믿고, 석 달 가량 남았다고 했더니, 그만 노사제가 까무러치더라는 것이다. 강남성모병원에서 있었던 또 한 가지 일화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회 젊은 수녀가 무슨 병인지 모르고 입원했는데, 동료 수녀들이 환자 수녀의 임종준비를 위해서 말기 암 병명을 알려주었겠다. 그 수녀가 숨을 거두기 전에 마지막으로 부탁한 사세구가 간절하다. “앞으로 저 같은 환자가 생기면 말기 암이라는 병명을 끝까지 밝히지 마세요, 암 덩어리가 몸속에서 나날이 자란다는 생각이 가장 괴로웠어요.”

우리는 남에게 상처를 주지 않으려고, 사랑 때문에 해가 안 되는 거짓말을 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이 경우 진실의 가치보다 이웃사랑의 가치가 우선한다고 보겠다.

보복하지 말라(마태 5,38-42=루가 6,29-30)

중동 아열대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다혈질이라 복수심이 강하다. 함무라비 법전(200조), 그리고 구약성경(출애 21,24; 레위 24,20; 신명 19,2)에 “눈에는 눈으로, 이에는 이로”라고 언표되는 동태복수법이 나온다. 꾸란에서도 복수를 당연시했다. 예수께서는 보복을 금하셨다.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시오. 오히려 누가 당신의 오른편 뺨을 때리거든 그에게 다른 편 뺨마저 돌려대시오. 당신을 재판에 걸어 당신의 속옷을 가지려는 사람에게 겉옷마저 내어주시오. 누가 당신에게 천 걸음을 가자고 강요하거든 그와 함께 이천 걸음을 가시오. 당신에게 청하는 사람에게는 주고, 당신에게 꾸려는 사람은 물리치지 마시오.”

이 말씀 가운데서 “악한 사람에게 맞서지 마시오.”라는 원론도 받아들이기 어렵겠거니와, 이어 나오는 구체적 지침 네 가지는 정말 수용하기 어렵다(졸저, <마태오복음이야기>, 성서와 함께, 1999, 46-48쪽 참조). 여기에 나오는 구체적 지침 네 가지는 그야말로 예수님의 언어충격요법이라 하겠다. 가장 큰 계명인 사랑의 이중계명 테두리 안에서 이 세부적 지침들을 이해해야겠다.

나가는 말

그리스도인은 하느님께 가는데 예수께서 제시하신 길을 따른다. 그래서 위에서 예수 코스의 면면을 적어보았다. 나는 조상님들 덕분에 이 코스를 밟게 된 것을 천행으로 여기면서 나날이 감사하게 살고 있다. 범사감사(凡事感謝: 1데살 5,18)하는 마음이다. 그러나 나는 다른 코스를 택한 도반들의 생각도 존중한다. 특히 2011년 8월 23일 조계종 화쟁위원장 도법 스님이 발표한 〈21세기 아쇼카 선언 초안〉을 눈여겨본다. 그 내용이 매우 진솔해서 큰 감명을 받고, 내가 가는 예수코스를 되돌아보는 계기로 삼고자 한다. 21세기 아쇼카 선언 초안〉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 열린 진리관= 불교에만 진리가 있다고 주장하지 않는다. 진리는 특정종교나 믿음의 전유물이 아니다.
- 종교 다양성의 존중= 내 종교가 소중한 만큼 다른 사람의 종교도 소중하다. 이웃 종교에 대한 관용이란 소극적 차원 넘어 그들의 가르침에 귀 기울이고 배우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 전법과 전교의 원칙= 전법은 다른 종교인을 개종시키는 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의 행복과 안녕의 실현이 궁극적 목적이다.
- 평화를 통한 실천= 종교 간 갈등과 충돌은 사람의 일이지, 종교적 가르침의 문제가 아니다. 종교 간 갈등이 오더라도 평화로운 방법으로 평화를 이뤄간다.

끝으로, 역사의 예수와 신앙의 그리스도를 깊이 공부하고 싶은 이들에게 명저 두 권만 추천한다. 나의 은사 루돌프 슈낙켄부르크(Rudolf Schnackenburg 1914.1.5-2002.8.28)교수가 밝힌 네 복음작가의 예수 그리스도관을 김병학 신부가 우리말로 번역했다. <복음서의 예수 그리스도>,분도, 2009). 그리고 슈낙켄부르크의 수제자 요아킴 그닐카(Joachim Gnilka 1928- )교수가 역사적 예수의 말씀과 행적을 깊이 연구한 명저를 고 정한교 선생이 우리말로 번역했다.( <나자렛 예수>, 분도, 2002).

정양모 신부
* 1936년 경북 상주에서 출생.
* 1963년 프랑스 리용 가톨릭대학을 졸업. 사제로 서품.
* 1964년 독일 뷔르츠부르크대학에서 수학.
* 1970년 성서 신학 박사 학위 취득.
* 1971년 광주가톨릭대학 부교수.
* 1975년 안동교구 청송본당 주임신부.
* 1976년 서강대학교 종교신학연구소 연구원.
* 1978년-성공회 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역임.

* 저서로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주석판 시리즈인 <마태오 복음서>,
<마르코 복음서>, <루가 복음서>와 <이스라엘 성지/이영현 공저>, <마르코 복음 이야기>,
<네 복음서 대조/김윤주·배은주 공편>, <바울로 친서 이야기>, <위대한 여행>,
<사도행전 이야기>, <믿고 알고 알고 믿고> 등이 있다.
* <열두 사도들의 가르침(역주)>
* <성서를 읽는 11가지 방법> 엮임
* <이스라엘 성지>(개정판)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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