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리 비켜, 저리 가란 말이야."
전 폴란드 대통령이었던 '레흐 바웬사'의 강연이 있다기에 그를 좀 더 가까이에서 볼려고 자전거를 탄채 그가 도착할 장소를 향하고 있었는데 대학 직원하나가 신경질적으로 내게 한 말이다.
"저기 다른 사람들도 다 서서 기다리고 있는데 왜 나한테만 비키라는 거요?"
"그럼 너도 저기 가서 있어. 여긴 잠시 후에 추기경님이 지나가실 예정이란 말이야."
"추기경이 이 길을 지나가는 거하고 내가 여기 서 있는 거하고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이요? 그리고 당신 왜 내게 반말하는 거요?"
만약 내가 폼나는 양복에 로만칼라를 말쑥하게 차려입고 값 나가는 차에서 내렸으면 그 대학직원이 내게 그렇게 다짜고짜 무례한 반말로 저리 비키라는 말을 할 수 있었을까?
왜 우리들은 한 인간 그 자체의 존엄을 바라보지 못하고 그 사람을 포장하고 있는 포장지에 불과한 것들에 따라 사람들을 대우할까?
제 2차 바티칸 공의회 이전 교회는 교황을 중심으로 추기경, 대주교, 주교, 사제들로 구성되는 교계제도안의 성직자들과 일반 평신도들로 양분되는 철저한 불평등사회라는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공의회의 교부들은 이러한 차이를 성무집행시 직무상의 차이일 뿐 결코 인간존엄이나 신분상의 차이는 아니라는 점을 강조함으로써 교회 역시 모든 인간은 하느님 안에서 똑같은 존엄성을 가지는 평등사회임을 명백히 밝힌바 있다.
하지만 실제로 우리에게 느껴지는 교회의 분위기는 어떤가? 적어도 내게 비추어지는 우리 교회의 모습은 여전히 인간 신분과 존엄상의 차이가 엄연히 존재하는 계급사회이자 불평등사회이다.
교회의 성직자들은 예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 즉 '길 잃은 양들에게 하늘나라를 선포할 것과 그 직무수행시 전대에 금이나 은이나 동전을 넣어 다니지 말것이며 식량자루나 여벌 옷이나 신이나 지팡이도 가지고 다니지 말라'는 간곡한 당부를 절대 잊어서는 안된다.
또 교회의 성직자들은 예수님의 다음과 같은 위선자들에 대한 책망을 가벼이 받아들여서는 안된다.
"율법학자들과 바리아시파 사람들의 행실은 본받지 마십시오. 그들은 말만 하고 실행하지는 않습니다.
그들은 무거운 짐을 꾸려 남의 어깨에 메워 주고 자기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하는 일은 모두 남에게 보이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마나 팔에 성구 넣는 갑을 크게 만들어 매달고 다니며 옷단에는 기다란 술을 달고 다닙니다.
그리고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으려 하고 회당에서는 제일 높은 자리를 찾으며 길에 나서면 인사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이 스승이라고 불러 주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교회의 성직자들은 위의 두 가지 모습 중에서 어느 모습의 사람들로 비쳐지고 있을까? 사도들이 마땅히 지녀야할 삶의 모습과 예수께서 엄중히 경고하시는 위선자들의 삶의 모습 중 어느 모습이 우리 교회의 성직자들의 모습과 가까울까?
배 부른 교회와 성직자들이 어찌 가난한 이웃들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겠는가? 위선자들에 대한 주님의 실랄한 비판이 마치 나를 향한 꾸지람인것 같아 길 떠날 때의 첫마음을 기억하며 다시 그 곳으로 걸음을 옮겨본다.
"여러분 사이에서 높은 사람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남을 섬기는 사람이어야 하고 으뜸이 되고자 하는 사람은 종이 되어야 합니다.
사실은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바쳐 몸값을 치르러 온 것입니다."(마태20,25-28)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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