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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30주일. 2011. 10. 23).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1 조회수410 추천수4 반대(0) 신고
연중 제30주일. 2011. 10. 23.
 
마태 22, 34-40.
오늘 복음에서는 바리사이파 율법 교사 한 사람이 예수님을 시험해 보려고 율법 중에 가장 큰 계명이 무엇인지를 묻습니다. 예수님은 답하십니다. ‘네 마음을 다 하고 네 목숨을 다 하고 네 정신을 다 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온 율법과 예언서의 정신이 이 두 계명에 달려 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는 말은 오늘의 복음 외에 복음서들 안에 더 보이지 않습니다. 복음서들이 사랑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하느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고 말하기 위해서입니다. 요한 사도는 그 서간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므로 사랑하지 않는 자는 그 사랑을 모릅니다...그 사랑은,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는 그 사랑이 아니라 그분이 우리를 사랑하여 당신 아드님을...보내셨다는 것입니다.”(1요한 4, 8-10).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상대는 바리사이파 율법 교사였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는 것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사람들이 율법을 완벽하게 지키게 하기 위해, 인간 삶의 모든 경우를 가상(假想)하여 각 상황에서 지켜야 하는 율법의 차림표를 만들었습니다. 예수님 시대에 사람들이 지켜야 하는 율법 조항은 600개를 넘었습니다. 바리사이파 율사들은 율법을 다 배우지 못하는 무식한 사람들을 죄인으로 취급하였습니다.
 
율법 조항이 이렇게 많다 보니, 사람들은 율법에 정신을 빼앗겨 살아야 했습니다.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사람들이 의식하고 살도록 도와주기 위해 만들어진 율법이었지만, 이제는 사람을 죄인으로 만드는 덫이 되었습니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이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율법의 조항들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느님이 우리의 삶 안에 살아계시도록 하라는 말씀으로 들립니다.
 
율법의 기원은 기원 전 13세기, 이집트 탈출을 앞둔 모세가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준, 10계명에 있습니다. 구약성서 탈출기는 하느님이 모세와 계약을 맺으셨다고 말합니다. 그 계약의 내용은 하느님은 이스라엘과 함께 계시고, 이스라엘은 그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하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이 함께 계시는 하느님에게 충실한 것은 그분의 뜻을 받들어 사람들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일”(탈출 33,19 참조)을 실천하는 데에 있습니다. 모세는 그 실천을 열 개의 구체적 지침으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이 십계명입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율법 가르치는 것을 직업으로 한 율사들이 생기고, 성전에서 제물 봉헌을 전담하는 사제들이 생겼습니다. 율사들은 율법의 중요성만 강조하고, 사제들은 제물 봉헌의 의무만 과장한 나머지, 이스라엘은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치는 데만 정신을 쓰게 되었습니다. 본(本)과 말(末)이 전도된 것입니다. 하느님이 이스라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환기시키는 율법이었고, 하느님이 함께 계시기에 자기 노동의 대가를 하느님 앞에 가져와, 이웃과 나눈다는 것을 상징하는 제물봉헌이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느님을 잊으면서 율법도, 제물 봉헌도, 지키고 바쳐서 인간이 소원성취 하는 수단이 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 실세들은 율법과 제물 봉헌만을 강조하였습니다. 동시에 선하신 하느님은 사라지고, 사람들 위에 무자비하게 군림하며 율법으로 사람들을 지배하는 하느님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준수를 절대적이라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비난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율법 준수로써 쟁취해야 하는 구원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의 나라를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셔서 열리는 삶의 공간입니다. 현세이든, 내세이든, 하느님이 함께 계시면, 그것이 하느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셨습니다. 자녀가 아버지로부터 배워서 인간이 되듯이, 신앙인은 하느님으로부터 배워서 그분의 가치 질서를 살아서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과 악한 사람에게도 인자하십니다. 여러분의 아버지께서 자비로우신 것같이 여러분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시오.”(루가 6,35-36).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자비와 사랑이 하느님 나라의 질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질문하는 율사에게 하느님을 사랑하고 사람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계명’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율사가 질문에 그 단어를 사용하였기 때문입니다. 율사들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계명’이라는 단어로 표현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잊어버리고, 율법이라는 계명에만 집착하였기에, 예수님은 그들이 집착하는 그 단어를 사용하십니다. 계명 준수만 하는 무자비한 사람이 되지 말고, 하느님에 대해 깨달아서 하느님을 소중히 생각하고 그분의 사랑을 이웃을 위해 실천하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율법을 주고, 심판하기 위해 지켜보고 계시는 분이 아닙니다. 이 세상의 강자(强者)는 사람들 위에 군림하고 그들을 지배하기 위해 법으로 질서를 세웁니다. 그들이 주는 법은 인간의 자유를 제한하고, 그것을 범하면, 벌이 따라 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가르친 하느님은 사람들을 자유롭게 하십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부르는 사람은 우리의 삶이 베풀어졌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도 그 베풂을 자유롭게 실천합니다. 하느님 자녀의 자유입니다.
 
우리는 정도의 차이는 있어도 이기적(利己的)이고 또 배타적(排他的)입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긍정하고 방어합니다. 그러면서 우리는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에게서 고립되고, 이웃에서도 고립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율법 준수에 정신을 빼앗기고, 그것으로 자기 자신을 방어하여, 자기의 구원을 자기의 힘으로 쟁취하겠다고 고립되지 말고, 하느님을 생각하고, 그분과의 연대성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자비로우시니 우리도 이웃에게 자비로워야 하고, 하느님이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며 사랑하시니, 우리도 이웃에게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말씀입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게 하여,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뜻이...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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