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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21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1 조회수319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21일 연중 제29주간 금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54-5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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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요 몇일 방안에 하루살이같은 벌레가 잔뜩 나는 것을 보고 '방안에 음식이 있나?' 했다가, '곧 비가 오겠네'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눈을 뜬 아침 창 밖이 흐린 것을 보았습니다. 비가 오고 있었습니다.

누가 가르쳐준 것도 맞고, 또한 살면서 경험으로 얻어지는 순수한 지식들이 있습니다. 늘 답이 정해져 있는 공식과 같은 자연의 반복되는 규칙을 우리는 조상 때부터 단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배우고 알고 있습니다.


"너희는 구름이 서쪽에서 올라오는 것을 보면 곧 ‘비가 오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또 남풍이 불면 ‘더워지겠다.’ 하고 말한다. 과연 그대로 된다."



예수님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자연의 이러한 이치들은 그리도 잘 알면서 올바른 삶을 선택하는데는 틀리고 실수하는 우리를 질책하십니다.


"위선자들아, 너희는 땅과 하늘의 징조는 풀이할 줄 알면서, 이 시대는 어찌하여 풀이할 줄 모르느냐? 너희는 왜 올바른 일을 스스로 판단하지 못하느냐?"



그리고는 우리가 판단해야 할 과제 하나를 꺼내 놓으십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도중에 그와 합의를 보도록 힘써라. 그러지 않으면 그가 너를 재판관에게 끌고 가, 재판관은 너를 옥리에게 넘기고 옥리는 너를 감옥에 가둘 것이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결코 거기에서 나오지 못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 우리는 주저없이 "예"하고 따르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복음 말씀 끝에 등장하는 내용도 내 인생에 앞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그렇게 해야지 하면된다는 이야기입니다.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면 오늘 복음은 우리의 부족함에 대한 질책과 단순명료한 가르침 하나로 정리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자연 현상을 판단하는데는 지혜로우면서도 자신의 간단한 앞가림도 판단하기 쉽지 않은 우리의 이중적인 모습은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모습을 그저 거울보듯 보고 지나칠 수만은 없게 만듭니다. 왜 그런지 생각해봐야 할 듯 싶습니다.


자연의 이치를 보고 판단할 줄 알면서 자신 앞에 펼쳐질 일에 대해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중적인 모습은 이 모든 것을 바라보는 사람의 생각에서 우선 갈림길을 만납니다.

자연현상은 드러나는 조짐과 그 결과가 사람의 개입으로 결정되는 일이 아닙니다. 날이 흐리고 비가 오는 것을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그 내용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합니다. 우리는 그저 볼 뿐이고 우리의 경험을 통해 당연한 답을 판단하고 거기에 대비하는 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입니다.

인간 사이에서 일어나는 일들도 그 근본에는 우리가 판단하기 이전의 질서가 존재합니다.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분명 이유가 있고, 원인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것을 풀어내는 것이 이 일들의 답입니다. 그 일이 선과 악의 문제라면, 또 죄와 벌, 혹은 용서와 화해의 문제라면 그것 역시 선과 용서, 화해의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야 한다는 것은 정해진 답입니다. 마치 자연의 이치처럼 말입니다.

그러나 사람 사이에서의 일은 그 답이 자연에서처럼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습니다. 적어도 사람에게 관한 일에는 너무 많은 변수가 생깁니다. 절대적인 답은 옳은 방향으로 흘러야 하지만 실제 현실에서 그 옳은 답을 찾기란 생각처럼 쉬운일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사람들이 말하는 입장의 차이와 생각의 차이라고 불리는 각 사람의 판단이 있기 때문입니다. 판단이 늘 문제가 되는 이유는 사람의 일에 있어서는 사람은 그 사건이 가지고 있는 절대적인 선과 정의와는 별개로 각 개인의 판단에 따른 개인적인 선과 정의를 따라 답을 낼 가능성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연은 공식처럼 바른 답을 내지만 사람은 언제나 확실한 문제에 불확실한 답을 내는 일을 자주 합니다. 그리고 너무나 분명한 문제가 풀리지 않는 미해결 문제로 남겨지는 이유는 그 속에 자율적으로 판단하고 행동하는 사람이 그 답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예수님이 안타까워하신 것은 내가 누군가에게 잘못을 했을 때, 곧 내가 누군가에게 죄를 지었을 때의 문제였습니다.


"너를 고소한 자와 함께 재판관에게 갈 때...."



이 이후의 문장은 문제가 풀려가는 과정에 대한 진술일 뿐입니다. 가장 중요한 지점은 바로 이곳 "너를 고소한 자"에서 결정됩니다. 이 고소가 억울한 일을 말하는 내용이 아니라는 것은 "네가 마지막 한 닢까지 갚기 전에는" 이라는 이 이야기의 끝이 알려줍니다.

혹시나 남이 나에게 잘못한 일이라면 아무런 문제가 되질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는지, 언제 어느 정도에서 해결을 해야 할지 우리의 선의에 대한 아프지만 아름다운 고민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야기가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잘못을 저질렀을 경우 그 잘못의 이유도 알고, 잘못의 내용도 알지만 그것을 인정하고 답을 찾지 않는 것은 우리가 이기적인 생각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내 주변에 어떤 상처가 생기고 내가 감당할 수 없는 아픔을 준다는 것을 생각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그것보다는 잘못으로 인해 생긴 이익을 지키고, 자신의 잘못마저 인정하지 않으려는 시도를 우리는 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런 방어적인 입장이 더 커지면 결국 사람은 이런 잘못들은 나에게 상처를 입은 사람마저 내가 지배해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으로 일 자체를 곡해하는 엄청나게 비뚤어진 방향으로 흘러가게 합니다. 결국 힘이 없어서 헤아림이 약해서 당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자신의 부족함을 탓하고 결과적으로 죄인이 되어 버리는 말도 안되는 상황이 빚어집니다.


구름이 끼면 비가 오는 것이 당연하다면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 한다가 당연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한사코 그건 경우가 다르다고 말을 합니다. 그리고 돈을 빌려준 이가 호소를 해도 안되어 고소를 하게 되었을 경우 나를 도운 사람에게 몰인정함을 말하고, 욕설과 비난으로 온갖 상처를 입히고 당연히 갚아야 할 돈을 빼앗긴 듯 갚는 일이 우리에게 일어나는 것입니다. 선인도 없고 악인도 없으며 정의도 사라지는 현장입니다. 유독 사람에게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자연이든 사람이든 모든 일의 이치는 있고, 진정한 선과 정의는 있는 법입니다. 자연이 적당한 시간과 공간의 배경에서 일정한 변화로 하루, 한 해를 이루어간다면 사람들은 하루에도 너무나 많은 일들을 서로 작용하며 만들어 갑니다. 그래서 우리는 아무것도 정해진 것이 없는 듯 다양한 하루를 매일 새롭게 보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일들 중 분명 옳고 그름이 있는 일들이 있고, 혹시나 잘못으로 인한 일들은 그 출발점과 해결점이 발생과 동시에 존재합니다.


근본에 충실한 것이 중요합니다. 우리의 생각은 언제나 자유롭고 그 자유로운 생각 속에 선택도 다양하게 드러나지만 그것이 선과 악을 거스릴 수 있다는 생각은 말아야 합니다. 내가 좋아하고 나에게 유리한 것이 선이라 생각하고 선택하는 것은 그냥 나의 선택일 뿐 하느님이 정하시고 세상 모두가 아는 참 선과 정의를 건드릴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어떤 이들은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질 힘을 가지면 선의 기준도 바뀌는게 아닌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가 그렇듯 하느님이 만드신 삶의 기준도 그렇게 바뀔 수 없음을 그 단 한사람을 제외한 모든 이가 여전히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잘못의 시작에서 바로 되돌아 설 수 있는 순수한 사람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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