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무엇을 회개하여야 하나 - 윤경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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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윤경재 | 작성일2011-10-22 | 조회수401 | 추천수2 | 반대(0) 신고 |
무엇을 회개하여야 하나 - 윤경재
“너희는 그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러한 변을 당하였다고 해서 다른 모든 갈릴래아 사람보다 더 큰 죄인이라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 또 실로암에 있던 탑이 무너지면서 깔려 죽은 그 열여덟 사람, 너희는 그들이 예루살렘에 사는 다른 모든 사람보다 더 큰 잘못을 하였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도 회개하지 않으면 모두 그렇게 멸망할 것이다.” (루카 13,1-5)
경솔한 사람들은 불행한 사고를 당하여 죽은 사람들을 보고 천벌을 받아서 그리됐다고 쉽게 말합니다. 왜 그런 사고가 생겼는지 무엇인가 감추어진 이유를 따져 묻기가 귀찮고 겁나서입니다. 답을 알 수 없는 문제에 마주치면 눈을 감아버리기 쉬운 게 사람들 속성입니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세상 골치 썩여가며 살기가 싫다는 겁니다. 그러나 복음서에 나오는 바리사이 같은 유대인들은 오히려 한 술 더 떠 이런 문제에 정답을 알고 있다고 자만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를 당하는 것은 생전에 알게 모르게 하느님께 불경스러운 죄를 많이 지었기에 천벌을 받는 것이라고 단정했습니다. 이런 위험한 사고방식은 특히 욥기에서 확연히 드러납니다. 욥을 위로하러 찾아 왔던 세 친구의 태도에서 잘 드러납니다. 엘리파즈, 빌닷, 초바르 이 세 사람은 욥에게 자신도 모르는 새에 지은 죄를 찾아보고 고백하라고 어르고 윽박질렀습니다. 욥에게는 위로하러 온 친구들이 아니라 무고한 사람을 잡으러 온 형리처럼 보였습니다. 도저히 수긍하지 못하겠다는 욥을 설득시킬 방도가 없으니 결국 인간은 누구나 죄가 있는 것이니 무조건 죄를 용서해달라고 하느님께 빌라고 요청했습니다. 심지어 빌지 않는 그 자체가 죄라고 억지스러운 주장을 펼쳤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잘 읽어 보면 예수께서는 사람들에게 아주 새로운 진리를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변을 당해서 죽은 사람들의 이유를 무조건 죄 탓으로 돌렸던 사람들의 좁은 소견을 정정해 주십니다. 그들의 행동에는 무엇보다 먼저 죄의 경중을 따진 속마음이 담겼습니다. 그런 사고가 발생했을 때 죽은 사람은 더 무거운 죄를 지은 것이며 다행히 살아난 사람은 그들보다 가벼운 죄를 지어 불행이 유예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니 죽은 사람을 안타까워하기보다 자신들이 살아 있다는 것에 안도하는 얄팍한 행동일 뿐입니다. 그러니 이들 마음속에는 인과응보 사상에 젖어 책망과 안도가 교차할 뿐, 위기의 순간을 맞아 인생을 새롭게 바라보며 회개하는 기회가 되지 못했습니다. 오직 분별하는 마음만을 일으킨 것입니다. 예수께서는 이런 기회에 전혀 다른 시각을 착상해보라고 유도하신 것입니다. 죽음을 그저 죄의 유무 문제와 결부시키는 단순한 시각에서 벗어나 죽음을 새롭고 독특한 시각으로 바라보라는 말씀입니다. 죽음의 실재가 하느님께 나아가는 절호의 기회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그들의 죽음을 통해서 어떤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홀연히 죽음과 맞닥뜨린다면 너희가 악담하는 바로 그대로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너희가 그들이 무가치하게 벌을 받아 죽었다고 저주한다면 너희도 그런 대접을 받을 것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때 예수께서 ‘그처럼 멸망할 것이다.’라는 말을 쓰셨습니다. 멸망이라는 단어의 의미는 끝장난다는 말씀입니다. 무화(無化)한다는 뜻입니다. 즉, 예수께서는 인간이 죽음을 앞에 두었더라도 하느님께 나아가는 회개를 한다면 죽음으로 無化하거나 끝장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는 문이 된다는 진리를 말씀을 하신 겁니다. 즉 죄와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뜻입니다. 실제로 그 사건으로 그렇게 죽은 사람들이 무화했는지 아닌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다만 제3자인 사람들이 그렇게 지레 짐작하고 악담할 뿐입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회개하지 않으면 그 자신에게는 無化가 실제 사건으로 벌어지는 것입니다. 회개하지 않는 자는 그 엄청난 無化의 사건을 체험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이 사실은 변할 수 없습니다. 진리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회개(悔改)는 단순히 후회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옛일을 돌이켜 본다는 뜻의 반성(反省)도 아닙니다. 전인적으로 자신 삶의 방향을 하느님께 돌린다는 말입니다. 하느님께 방향을 두었기에 이제 하느님께 도달할 수 있는 것입니다. 방향마저 다른 데로 두면 도저히 도달할 수 없음은 자명합니다. 이런 사실을 현대의 교우들은 너무나 자주 들었기에 익히 안다고 자신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회개는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회개와 다를 수 있습니다. 현대에 사는 우리는 너무 개인적인 성향이 강해 개인의 성화나 개인의 회개에 지나치게 매달려 있습니다. 독일의 신학자인 본 훼퍼는 세계 제2차 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재 정권에 일생동안 투쟁했습니다. 그는 어느 교회에서 자신의 행동에 대해 이렇게 설교했습니다. “어느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있습니다. 그가 차를 사람들을 향해 돌진하면서 숱한 교통사고를 내며 달리고 있습니다. 만약 당신이 그 자리에 있었고 만일 기독교인이라면 뛰어다니며 부상자들에게 치료만 해주고 기도만 해주겠습니까? 아니면 미친 운전사를 차에서 끌어내리겠습니까?”라고 설파했습니다. 나중에 본 훼퍼는 히틀러를 암살할 계획을 세우기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암살기도가 발각되어 히틀러의 개들에 잡혀 투옥되고 사형 당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죽음 직전에 놀라운 환상을 보았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그 환상에서 하느님께서 재판장이 되시고 히틀러가 심판대에 서 있었습니다. 하느님은 엄중하게 판정하셨습니다. “너 히틀러는 그동안 많은 사람을 괴롭히고 무고한 피를 무수히 흘리게 했으니 지옥으로 가서 영겁의 불에 고통을 받아야 한다.” 이때 히틀러가 부르짖었습니다. “하느님, 저는 죽어서 이러한 세계가 있는 줄을 꿈에도 알지 못했습니다. 만일 미리 알았다면 저는 그러한 죄를 범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 하나 저에게 이런 것을 알려 주지 않았고 또 전도하는 자도 없었습니다.” 그 환상을 본 본 훼퍼는 가슴을 치며 회개했다 합니다. “주님, 저는 그 영혼을 불쌍히 여겨 전도할 생각은 미처 못 했습니다. 그를 끌어내리려고만 했지 회개시키는 것은 생각지도 못 했습니다.” 다음 대목은 열매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의 비유입니다. 무화과나무는 본래 생장 능력이 뛰어나 그 나무 한 그루가 있으면 주위에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한다고 합니다. 영양분을 모두 자신이 섭취하기 때문입니다. 그런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은 은총을 충분히 받았으나 아무도 하느님께 이끌지 못하고 사는 사람을 지칭하는 것입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어느 민족보다 우선하여 하느님을 아는 은총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오해하고 배반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다른 민족들에게 웃음거리로 되었습니다. 결국 다른 민족에게 잘못된 표양을 보여 하느님께 이끌지 못하는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그 무화과나무처럼 아무 열매도 맺지 못한 셈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행위를 하고 있는지 반성하며, 참된 회개를 하여야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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