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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천연 고춧가루의 위력 / 최강 스테파노신부
작성자오미숙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3 조회수591 추천수6 반대(0) 신고
 
 

조국의 민주화를 위해 평생을 투신하셨던 M목사님이 감옥에 계셨을 때 ‘파스요법’에 관한 책을 쓰셨는데 나는 한 선배 신부님의 권유에 의해 그 책을 접해 본 뒤로 종종 가벼운 증상에 대해서는 그 ‘파스요법’의 덕을 많이 보고 있다.

요 며칠 감기 기운이 있는지 목이 좋지 않아서 목의 한 가운데 우물처럼 푹 파인 부위와 그 살짝 위에 하얀 파스를 붙이고 다녔더니 함께 사는 신부님들의 반응이 참으로 다양했다. 동양권에서 선교하셨던 분들은 대체로 긍정적인 반응이었지만 남미나 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하셨던 분들은 무슨 부적쯤으로 여기는 것 같았다.

그 중 방글라데시로 선교를 나가기 전 이탈리아 말공부에 한창인 콜롬비아 출신 알베이로 신부님이 이것저것을 물어보면서 대단한 관심을 보이기에 나는 이제마 선생이라도 되는 양 거들먹거리면서 명의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어디 보자, 알베이로 신부님, 몸이 많이 안 좋은 것 같은데? 요즘 잠은 잘 자나?”

(우스갯소리이지만 원래 말을 놓아야 더 권위가 있어 보인다고 생각하는 세 가지 못 말리는 직업이 있다. 의사, 건달, 신부... 이 세 가지 직업 중에 누가 제일 잘 나갈까? 건달들은 신부에게도 습관적으로 자기 직속선배에게 하는 식으로 말한다. “제가 있잖습니까요... 신부님을 ‘나으’ 큰형님으로 모시고 고백성사를 좀 보고 싶습니다요.” 그렇기 때문에 건달은 자기 직업 언어상 신부들에게 딸린다. 문제는 신부와 의사 중 누가 더 잘나가느냐 하는 건데 결론은 신부다. 왜냐면 의사들은 일터에서 근무시간에만 말을 놓지만 신부들은 정해진 일터고 근무시간도 없다.)

"어? 어떻게 알았지? 요즘 머리가 아파서 잠을 잘 못 자는데 그거 붙이면 잠도 잘 잘 수 있을까?”

“어떻게 알긴... 다 알어. 한의학에서는 관상이라는게 있는데 얼굴에 다 나와. 잠을 잘 못잔지 꽤 됐구만. 저런...쯧쯧쯧. 잘 됐네. 이게 또 불면증에는 특효지.” 원래 외국말공부 시작한지 한 두달 되는 사람들은 잠을 자도 머릿속에서는 계속 단어를 떠올리며 외국말로 대화하는 꿈을 꾸기 때문에 잠을 자도 개운하지가 않는 법이다.

숙면을 취하지 못하는 괴로움을 해소할 수 있다는 기대 반, 또 ‘파스요법’에 대한 호기심 반으로 들떠있는 알베이로 신부와 내 방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해 놓고 한참 인터넷에서 불면증에 효과가 있는 혈을 찾아보고 있는데 정보를 채 찾기도 전에 알베이로 신부가 내 방에서 노크를 하고 있었다.

할 수 없이 ‘파스요법’은 나중에 하기로 하고 불면증에는 최고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발목욕’을 하게 해 줬더니 땀을 뻘뻘 흘려가면서 공기방울, 진동기능이 있는 족탕기에 완전히 반하고 있는 느낌이었다.

발목욕을 끝내고 방에 가서 양말을 두 켤레 신고 자리에 누우면 금방 잠이 올거라 했더니 알베이로 신부가 자꾸 자기도 그 ‘파스’를 붙여 달라고 졸랐다. 솔직히 어디에 붙여야 되는지 알 수 없었지만 너무 졸라대는 통에 언뜻 머리가 아플 때 관자놀이 부위를 손가락 마디로 꼭 누르라는 말이 생각이 나서 알베이로 신부의 양쪽 관자놀이 부위에 파스를 붙여 주고는 방으로 보냈다.

다음 날 오후, 학교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알베이로 신부를 찾았더니 아무도 본 사람이 없었다. 알베이로 신부는 그 날 오후 내내 흔적도 안보이더니 저녁기도 시간에야 나타났다.

“어이, 알베이로 신부. 오후 내내 어디 갔었어? 어젯밤에는 푹 잘 잤지?”

“뭐? 잘 자? 잘 잤으면 내가 학교에서 내내 졸다가 또 집에 와서 오후 내내 잠잤겠어?”

다시는 파스 안 붙인다고 투덜거리며 아직 조금 빨간 기운이 남아있는 관자놀이를 쓰다듬는 알베이로 신부를 뒤로 하고 의아해 하면서 방으로 돌아와 목에 다시 파스를 붙이다가 겉봉에 쓰여 있는 글귀를 보고 나는 터져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 앉아버렸다.

“천연고추가루성분함휴, 눈 주위에 붙이지 말 것”

나는 왜 이렇게 살아가면서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을 하며 불편하게 살아가는걸까? 아직 나 자신의 모습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스스로 편안하게 인정하지 못하기 때문에 자꾸 원래의 나 자신보다 더 아는 척, 있는 척, 잘난 척을 하려드는 것일게다. 나의 마음이 가난하지 못한 탓일게다.

하느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실천에 앞서 나 자신의 모습과 한계를 있는 그대로 솔직히 발견하고 인정하는 일. 그 작업이 자신 안에서 잘 이루어지지 않는 사람이 섣부르게 이웃에게로 나아가면 결국 손해를 보는 것은 그 이웃들이다. 그래서 과장된 선행은 결국 선으로 결말을 짓지 못하는 경우를 우리는 종종 체험한다.

‘나’를 발견하는 만큼 ‘하느님’을 발견할 수 있고 ‘나의 한계’를 인정하는 만큼 ‘너의 한계’ 또한 인정하고 내 안에 편안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 우리는 절대자 하느님이 아니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사는 것이 편안해 진다. 그래서 ‘하느님이 누구이신가’라는 질문은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바쁜 주말에 할 일이 또 하나 늘었다. 중국음식만 보면 일단 웃음을 짓는 알베이로 신부와 근처 중국집에라도 같이 가서 기분 좀 달래줘야 하는 일...

“여러분은 그저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만 하십시오. 그 이상의 말은 악에서 나오는 것입니다.”(마태5,37)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http://cafe.daum.net/frchoika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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