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10월 25일 연중 제30주간 화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18-21
그때에 예수님께서 말씀하셨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그것을 무엇에 비길까?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하느님의 나라를 무엇에 비길까?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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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겨자씨와 누룩. 하느님 나라와 비교되는 이 두가지 물질은 우리 모두가 꿈꾸는 하느님 나라와 너무도 다른 모습입니다. 하늘나라에 들어가기가 힘들다는 생각에 사로잡히면 하늘나라가 이렇듯 찾기 힘든 곳인가 하는 걱정까지 밀려듭니다. 눈에 보이지도 잡히지도 않는 것으로 하늘 나라를 생각해야 한다는 것은 희망이라고 하는 씨앗 이상의 의미로 보이질 않습니다.
하지만 복음에서 겨자씨는 결국 하늘의 새들이 깃드는 크기로 자라나고 누룩은 밀가루 반죽을 온통 부풀게 만듭니다. 보이지 않는 것에서 엄청난 성장이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 큰 기쁨과 행복한 삶의 결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작은 가치를 소홀히 하지 않도록 해야 함은 분명해 보입니다.
그런데 꼭 예수님의 비유가 아니라도 누구나 하늘나라를 꿈꿉니다. 하느님께서 다스리시는 나라는 행복 가득한 미래라는 것을 누구나 알고 있고, 그 나라에 들어가 위해 애를 쓰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 또한 누가 가르치지 않아도 너무나 분명한 이치입니다. 이 좋은 가치를 비유해서 잘 설명하려면 가능한대로 가장 좋고 훌륭하고 거대한 가치를 통해 모두가 부러워하게 하는 것이 옳은 방법일듯 한데, 왜 예수님은 가장 작은 가치를 통해 하늘나라를 설명하려 하셨을까요.
하늘나라는 우리 머리 속에서 생각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요, 최상의 가치가 존재하는 곳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생각할 수 있는 하늘나라는 항상 우리가 살아가는 이기적인 선악의 기준을 따를 때가 많습니다. 보다 잘 살고, 보다 도덕적이고, 보다 내가 행복한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최상의 가치들이며, 그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것이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우리가 좋아하는 것으로 채워진 듯 설명되곤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우리에게 오셔서 이루셨던 천국의 모습은 모든 이들이 생각하는 것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오셨을 때 우리의 삶은 행복하긴 했지만 가진 것을 기준으로 우리가 변화하지는 않았습니다. 누군가는 부자가 되어 행복하고, 누군가는 성공을 하여 행복해진 것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변화에 있어서 우리가 생각하는 대로 더 잘 사는 방향으로 행복을 가르치지 않으셨습니다. 누군가는 가난한 이들의 병이 낳음을 이야기하는데 병자가 낳는 것은 우리와 같은 삶을 살게 되었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 치유는 놀라우나 그 결과는 우리가 함께 살 수 있다는 것 이상은 아닌 셈입니다.
그런 모습이 우리가 그리는 천국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 격차는 참으로 커 보입니다. 그 모습에서 천국을 본다는 것은 참 힘든 일입니다. 차라리 싸워 이기는 식으로 더 많은 것을 차지하는 천국은 그 모습의 화려함에서 더 힘이 될 듯 싶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고민 끝에 등장한 천국의 가르침은 우리가 생각하는 천국의 헛점을 정확히 집어내는 대신 천국의 느낌을 생생히 전해줍니다.
겨자씨는 결국 필요하다 말은 하지만 당장은 어떤 쓸모도 없어 보이는 모습입니다. 하느님 말씀대로 산다는 것이 옳기도 하고 바르기도 하지만 지금 주위에 누구도 그렇게 살지 않는데 그것은 하느님만의 가치로 제외하고 우리는 우리의 이기심을 바탕으로 우리 몸에 달고 단 것을 중심으로 살아갑니다. 그래서 겨자씨를 심는 행동은 옳긴 하지만 바보같은 행동 쯤이 됩니다. 그런데 결국 이 겨자씨는 나무로 자라나 새들이 깃들이는 결과를 가져 옵니다. 새들이 깃들이는 곳은 삶의 휴식이 있는 곳이며 안정이 있는 곳을 말합니다.
천국은 살기 위해서라고 말하는 삶의 고통이 멈추는 곳입니다. 왜냐하면 천국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 그늘이 되어 주는 서로를 위한 사랑이 이루어지는 그야말로 그늘 속에서 누군가의 그늘이 되어 주는 곳이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겨자씨와 같다. 어떤 사람이 그것을 가져다가 자기 정원에 심었다. 그랬더니 자라서 나무가 되어 하늘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다."
또한 누룩은 밀가루 속에 파묻혀 누구도 보지 않는 사이에 그 모든 반죽을 부풀게 만듭니다. 누구의 기대도 없이 어떤 작용이 눈에 보이지도 않게 서로를 풍성하게 만들어 더 많은 이에게 생명의 풍성함을 나누어주게 됩니다. 우리는 밀가루로 얽혀 있으면서 서로 작용하려 들지는 않습니다. 중간에서 사람들의 사이를 이어주고 그로일한 수고를 당연한 듯 여기는 일은 드뭅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지 않는 일은 전혀 하려고 하지 않는 사회, 그리고 같은 밀가루이면서도 자신이 더 드러나려 하는 세상에서 이 밀가루들은 뭉치는 일도 부푸는 일도 불가능합니다. 그러나 누룩은 그 모든 밀가루들을 서로 작용시킵니다. 그리고 자신의 모습은 끝내 보이질 않습니다.
하늘나라는 자신의 존재가 함께하는 이들의 행복으로 확인되는 세상입니다. 모든 사람이 사랑하는 사람뿐인 세상에서 산다는 것, 또한 누군가 끊임없이 나를 사랑하여 개인적인 삶이나 이익이 구분되지 않는 누구도 내 죽음을 생각조차 하지 않는 영원히 함께 사는 사랑의 세상입니다.
"그것은 누룩과 같다. 어떤 여자가 그것을 가져다가 밀가루 서 말 속에 집어넣었더니, 마침내 온통 부풀어 올랐다.”
겨자씨이든 누룩이든 이 작은 것의 내용은 결국 휴식과 생명의 나라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유를 보여줍니다. 그것은 혼자인듯 보이나 삶의 시작부터 결과까지 모두 누군가를 위한 사랑으로 드러납니다. 또한 그 자신이 드러나지도 구분되지도 않는 것으로 드러납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예수님의 얼굴에 비쳐있는 미소가 보입니다. 그런 주님과 함께 있는 작은 천국의 모습이 떠오르는 듯 합니다. 우리가 서로의 겨자씨가 된다면, 누룩이 된다면 우리가 그리는 천국의 모습은 지금과는 참 많이 다를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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