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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027
작성자김용현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6 조회수319 추천수1 반대(0) 신고
2011년 10월 27일 연중 제30주간 목요일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3,31-35

그때에 바리사이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다가와, “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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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서 이곳을 떠나십시오. 헤로데가 선생님을 죽이려고 합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고 선으로 향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질서가 꼭 선과 정의의 말씀인 하느님의 말씀과 일치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때때로 하느님의 말씀은 세상의 질서와 충돌을 일으키거나 위협받는 처지에 놓이게도 됩니다. 하지만 상대적인 힘에서 권력의 자리에 있지 않는 한 이 충돌에서 일방적으로 위협을 당하는 것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물론 권력을 지녔다 하더라도 사랑을 말하는 이 선한의 기준은 반드시 상처를 안을 수밖에 없는 처지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았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과 행동은 언제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언제나 옳았지만 그 옳음을 이해할 필요가 없는 처지의 사람들과 항상 죄인으로 내몰리는 사람들까지 그 말씀을 듣고 그 죄에서 일어서려는 시도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그들을 여전히 죄인으로 묶어두려는데서 마찰이 생길 수밖에 없었고 한사코 그 죄인들과 함께 계시는 예수님의 처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었습니다. 또한 예수님의 사회적 지위 역시 문제가 됩니다. 이천년 전의 예수님은 우리가 지금 생각하는 것과 달리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이 아니시고 한 사람의 바리사이도, 율법학자도 아닌 평범한 시골출신 떠돌이 선생이 정도여서 그분을 사회의 방식으로 처리할 방법은 너무도 많았습니다.


바리사이들이 와서 예수님께 전해드린 이 위협의 이야기는 아무런 힘도 없으신 예수님께 내려진 사전 사형선고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하느님의 예언자들까지 죽였왔던 세상의 권력자들이니 예수님 한 분을 처리하는 것은 필요한 일이라면 언제든 가능한 일이었던 셈입니다. 게다가 예수님 때문에 세상이 시끄럽고 죄인들마저 자신들의 인격에 대해 자각을 가진다면 큰 일이었으므로 그들 모두에게 유일한 희망이었던 예수님은 쉽게 목표가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입에서 예상 밖의 말씀이 등장합니다.


"가서 그 여우에게 이렇게 전하여라. ‘보라, 오늘과 내일은 내가 마귀들을 쫓아내며 병을 고쳐 주고, 사흘째 되는 날에는 내 일을 마친다. 그러나 오늘도 내일도 그다음 날도 내 길을 계속 가야 한다. 예언자는 예루살렘이 아닌 다른 곳에서 죽을 수 없기 때문이다.’"


헤로데로 우리가 이야기하는 세상의 권력자에게 예수님은 당신의 일이 그칠 수 없는 것임을 이야기하십니다. 위협으로 다가온다면 희생으로 맞이해주겠노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싸움이 아닌 그 위협을 정면으로 관통하는 가치를 보여주시는 대단한 힘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이런 일을 반복하는 이스라엘의 좌절스런 모습에 한탄섞인 이야기를 이어가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예언자들을 죽이고 자기에게 파견된 이들에게 돌을 던져 죽이기까지 하는 너! 암탉이 제 병아리들을 날개 밑으로 모으듯, 내가 몇 번이나 너의 자녀들을 모으려고 하였던가? 그러나 너희는 마다하였다."


예수님을 위협하는 헤로데, 아니 하느님을 위협하는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이야기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은 그 결과에 대한 예언에 앞서 하느님의 거듭되는 사랑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어떻게든 배신하고 도망치려는 당신 백성을 끝까지 안으시려는 하느님의 시도에 하느님의 예언자들은 항상 희생당하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그럼에도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느님의 사랑은 결국 예수님의 오심으로 이어졌습니다. 일방적인 사랑이라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어제도, 오늘도, 그 다음날도로 표현되는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 암탉의 모습이었고 그런 분에게 와서 위협을 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모습이 거듭 반복되고 있습니다.


"보라, 너희 집은 버려질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오시는 분은 복되시어라.’ 하고 말할 날이 올 때까지, 정녕 나를 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예루살렘에 대한 저주로 보이지만 그 말씀은 여전히 그들이 하느님을 알아보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그친다면 이 희망조차 주어지지 않겠지만 분명 예루살렘의 절망적인 미래에 대한 말씀에도 실낱같은, 아니 실현 되리라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을 전제로 말씀이 주어지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이야기하면서도 현실적인 것으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하느님을 말할 때 그 말씀은 분명 옳고 정의롭지만 우리는 그분의 말씀 뒤에서 현실에서의 이기적인 삶을 어쩔 수 없는 것으로 말하고 질서짓고 살아가곤 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은 성당에서나 지키는 법이 아닙니다. 그리고 일반 신앙생활에 더 특별하고 특수한 것을 더해 가장 거룩하고 엄숙하고 의미있는 것을 한다고 해서 하느님 말씀을 이루는 것이라고도 말할 수 없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언제나 우리의 일상 생활 안에서 지켜져야합니다.


예수님이 위협당하셨던 이유는, 숱한 예언자들이 목숨을 잃었던 이유는 그것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 말씀이 옳다고 말하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이유들을 대며 그 말씀을 잠시 미루거나 어긴다면 그것은 어쩔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지키지 않는 것 뿐입니다. 그렇게 살 때 우리 삶은 전혀 문제가 생기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하느님의 말씀을 희생시키고 난 뒤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성전에 아름다운 것들로 신앙을 치장한다면 우리가 예루살렘과 다를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사회 질서는 힘이 셉니다. 사랑을 이야기하는 그리스도보다 사람에게 욕을 할 수도, 죽일수도 있는 이들은 분명 힘이 셉니다. 그러나 그렇게 산다해도 잊지말아야 할 것은 우리를 사랑하시는 하느님은 포기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자주 삶을 핑계로 하느님의 말씀을 어기고 엉뚱하게 신앙생활을 할 때도 하느님은 우리에게 언제나 옳은 삶을 요구하신다는 것을 거절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이 하느님의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어제도 그러셨고, 오늘도 그러실 것이고, 그 다음날도 그 사랑은 그치지 않을 것입니다.


언제라도 삶에서 하느님을 살아가는 날이 와서, 우리가 이미 함께 하시는 하느님을 만나뵙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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