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본당 교우 분들 한주 일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또 먼 곳에서 순례 오신 순례자 여러분들!
주님의 이름으로 또 성모님의 사랑으로 환영합니다.
아마 10월 달이 가기 전에 성모님 성지 한 번 둘러봐야 도리일 것 같아서
이렇게 새벽밥 해먹고 일찍 오신 여러분의 정성에 저는 눈물 콧물이 다 납니다.
여러분들에게 상품은 없지만 퀴즈 한 가지 내겠습니다.
너무 긴장하지 마시고 초등학교 근처에만 가도 아는 상식인데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가 구약시대입니까? 신약시대입니까?
근데도 3분의1밖에 대답을 안 하시네요.
문제가 너무 좀 어려웠나봅니다.
다시 한 번 묻겠습니다. 지금 살고 있는 우리시대가 구약시대입니까?
신약시대입니까?
-신약시대입니다.-
예, 그렇지요?
우리는 지금 신약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문제는 몸뚱아리는 분명히 신약시대에 살고 있어요.
다른 말로 하면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그런데 정신만큼은 아직도 구약의 정신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이 많다.
성령의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 여전히 율법주의 적이고
바리사이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신약이냐 구약이냐 하는 것은 시간의 의미가 아니라 현재 상태입니다.
내가 지금 신약에 시대에 살고 있고 천주교신자가 돼 있다 하더라도
사고방식은 지극히 율법주의 적이고 구약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많겠는가?
몸은 신약의 인간이지만 마음은 철저하게 수천년 전
구약의 정신으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대개가 세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몸은 신약에 있지만 구약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에 첫 번째 특징은 뭐냐?
선인과 악인 중에 하나를 택하라...
그런다면 자기는 죽었다 깨도 선인 쪽에 속해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운동장 한가운데다가 금을 그어놓고 어느 퀴즈프로에서 하듯이
‘선인’그리고 ‘악인’이렇게 금을 그어놓고 자기가 속해있다고 생각하는 쪽에 줄을 서시오 하면 구약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선인 쪽으로 슬금슬금 눈치 보면서
그리로 들어갑니다. 마치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이처럼.....
의식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충만 의식이 있고 결핍의식이 있는데 이 구약의 인간들은
늘 교만으로 충만해있기 때문에 자기는 절대로 죄인이 아니라고 착각을 합니다.
이정도 살면 그래도 의인에 속하고 선인에 속해있지.....
교만의 충만의식은 교만의 바벨탑을 쌓을 뿐이요, 영적성장은 늘 제로상탭니다.
우리들은 늘 결핍의식을 갖고 살아야 됩니다.
주님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예수님 없이는 한 발자욱도 걸을 수도 없고
일어설 수조차 없는 죄인 중에 죄인이라고 하는 그 결핍의식,
바로 그것이 오늘 복음 중에 나오는 세리의 말이었고
하느님의 마음의 문을 연 겸손한 말이었습니다.
늘 자기 자신이 하느님 앞에 당당하고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큰 병이 있지요?
에이즈보다 무섭고 암보다도 무서워요!
에이즈나 암은 몸뚱아리만 죽일 뿐이지만
영혼을 영원히 죽여 버리는 무서운 병 바로 그것이 불감증입니다.
무슨 병이요? 못 느끼는 병, 은총의 불감증환자들이 있습니다.
말씀의 불감증환자들이 있습니다.
죄의 불감증환자들이 있습니다.
은총의 불감증환자들은 자기 집에 얼마나 많은 은총이 와있는 걸 모르고
은총 찾아 삼만 리, 여러분들이 성지 와서 은혜를 받는 것이 뭐냐?
성지에 와 보니까 우리 집에 얼마나 은총이 많이 내린 것이구나! 하고 깨닫는 게 은총입니다.
은총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겸손하게 발견하고, 고백하고, 감사하는 것이 은총입니다.
속 쎅이는 내 새끼가 그게 은총덩어리였구나!
바람 피는 내 남편이 그게 은총덩어리였구나. 웬수가 아니라.....
내 몸에 난 바로 이 병이 바로 하느님 가까이 하게 한 은총덩어리였구나.
은총은 찾아 헤매는 것이 아니라 발견하는 겁니다.
은총의 불감증환자들은 늘 찾아 헤매면서 자기에게 쏟아지는 은총을 보지 못합니다.
말씀의 불감증 환자들도 일 년 내내 미사 때마다 좋은 얘기를 들어도 일 년이 지나도 머리에 남는 건 아무것도 없습니다.
한쪽귀로 들어와서 한쪽귀로 흐르고 어떤 열매도 아무것도 맺지를 못합니다.
가을이 되면 그 하찮은 식물들도 ‘이렇게 살려주신 거 감사합니다.’
하면서 어떤 방법으로든지 열매를 맺어줍니다.
그러나 인간만이 유독 세월이 수십 년이 지나도
아무런 열매를 못 맺고 살아가는 이 말씀의 불감증 환자들이 아닌가?
죄의 불감증환자들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도 죄인이라는 것을 모릅니다.
일 년에 한두 번 억지로 판공성사지, 판공성사 표하나 가지고 고백소에 들어가서, 일 년 만에 딱 한번 들어가는데도 2분 안에 기어 나옵니다.
세상에~~ 나는 사제지만 한 달에 한 번씩 성사를 봐도 그렇게 성사 볼 꺼리가 많은데......
저 인간은 도대체 일 년에 한 번 보면서.....
아, 우리성당에 성인들 많이 났다. 감탄을 합니다.
이런 죄의 불감증 환자들.
이런 죄의 불감증 환자들에게는 오늘 복음에 나오는 바리새이처럼
불감증에 걸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 들으셨죠?
다시 말하면 비교를 합니다.
‘저는 저 세리처럼.....음탕하지도 않구요, 부정직하지도 않아요.’
늘 지보다 잘못 사는 사람을 비교의 대상으로 합니다.
주일 안 지키는 내 남편에 비하면 주일 꼬박꼬박 지키는 내가 의인 쪽에 서있다고 착각을 합니다.
뒷집에 사는 베드로, 이십년 냉담한 저 인간보다는 냉담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가 저 인간보다는 훨씬 더 의인 쪽에 속해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 눈에 보이는 인간은 우리의 비교대상이 아닙니다.
오로지 우리의 비교의 대상은 우리 가슴속 한가운데 계실 분은
예수그리스도 한분이십니다.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속으로 외치십시오.
나는 예수님만큼 기도하는가!
기도 안하는 사람과 비교하면 기도 꽤나 하는 것처럼 착각이 들지만
예수님의 기도에 비하면 그것은 기도도 아닙니다.
나는 예수님만큼 봉사하는가!
오만봉사 다한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하셨던 그 봉사에 비하면 봉사도 아닙니다.
늘 어쭙잖은 거하고 티를 내고 알아줘야만 기분이 좋고 못 알아주면 성질부리고
이건 봉사도 아닙니다.
물질이 들어간 건 절대로 봉사가 아닙니다.
나는 그리스도만큼 희생하고 살아가는가!
여러분들 중에 아무리 희생을 많이 하고 살아가는 사람이라도 예수님에
희생에 비하면 희생이 아닐 겁니다.
이렇게 주님을 내 삶에 중심에 두고 비교하다 보면은 찾아오는 것은
‘으메~ 기죽어!’ 비참한 마음뿐입니다.
‘주님 저는 주님 앞에 아무것도 자랑할게 없는 죄인입니다.
그저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바리새이는 얼마나 당당했습니까?
성전 앞에 딱 버티고 서서 ‘저 아시죠? 일주일에 두 번 단식해요.
십일조는 칼같이 냅니다. 저 뒤에 고개 숙이고 있는 세리 저놈과는
저는 차원이 다른 인간입니다. 저는 음탕하지도 않구요.... 부정직하지도 않아요....
못된 짓 한 적도 없어요.... 감히 저놈이랑 비교하지 마십시오.’
그러나 그날 의인으로 인정받고 돌아간 것은 감히 하느님을 쳐다보지도 못하고
‘주님! 죄인에게 자비를 베풀어주십시오.’ 하고 죄인임을 고백했던 세리였습니다.
그래서 몸은 신약에 살고 있지만 철저하게 구약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의 첫 번째 모습이 늘 자기는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라고 착각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지금 이 자리에는 미사를 드리는 사제를 비롯해서 이 자리에는
죄인들만이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아직도 안 늦었습니다. 본인이 의인 쪽에 속해있다고 생각하시면
조용히 일어나셔서 집으로 가십시오.
이 자리에는 죄인들만 앉아있을 수 있습니다.
의인에게 어찌 하느님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느님은 결핍의식이 필요한 사람한테 필요한 사람입니다.
두 번째로 구약의 인간의 두 번째 특징은 뭐냐?
혓바닥을 다스릴 줄 모릅니다.
그 혀로 남을 격려하기보다는 입만 열었다 하면 비판하고 독설이 뿜어 나옵니다.
<집회서 28장 17절에 사람이 매에 맞으면 맷자국이 남지마는 사람의 혀에 맞으면 뼈가 부서진다.> 여러분들 다 체험하고 사시잖아요?
저도 사제생활하고 살면서 얼마나 사람의 혓바닥에 맞아서
얼마나 피를 많이 흘리고 사는지 모릅니다.
지금도 그래요. 헛된 루머, 악성루머에 시달리죠.
여러분들도 본당에서 나에 대해서 여러분 자신에 대해서
누가 떠들고 다닐 때 나중에 들어보면 경악을 금치 못합니다.
세상에 어떻게 이런 얘기를 꾸며낼 수가 있을까?
남편과 싸우다가 남편에게 줘 터져서 눈탱이가 밤탱이가 되더라도 열흘 못갑니다.
싸우나 몇 번 갔다 오면 밤탱이가 없어져요.
그런데 남편이 손 하나 까딱 안하고 혓바닥으로 아내를 죽일 수 있고
아내가 눈 하나 깜짝 안하고 나긋나긋하게 남편을 아주 밟아죽일 수 있습니다.
혓바닥으로......
십 년 전에 있었던 일을 마누라가 십 년 후에 또 끌고 나옵니다.
남편은 돌아가십니다.
‘야! 너 그거 옛날얘긴데 아직도 안 잊어버렸냐?’
여자는 잊어버릴 수가 없습니다.
왠지 아시죠?
애기를 낳아봤기 때문에 창고가 큽니다.
그 창고에다 계속 쌓아두기만 하는 성격이죠.
남자들은 사실 단순합니다.
그렇게 오래 못 갖고 살지만 여자들은 꼬박꼬박 돌에 새겨놓습니다.
남자가 애를 안 낳는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그래도 창고가 작으니까 단순하게 살지요.
개신교에서는 목회자가 신자 집을 방문하는 것을 뭐라고 그러죠?
심방이라고 그럽니다.
그 말 자체에는 더할 것도 없고 뺄 것도 없이 축복을 주러간다는 뜻이 있어요.
그런데 개신교에서 그 단어를 미리 써버리니까
우리 천주교에는 심방이라는 단어를 못 쓰요.
그러니까 무슨 말? <방문 간다.> 그래요.
그런데 방문의 의미에는 축복이라고 하는 개념은 1%도 없습니다.
빚쟁이가 쳐들어가는 것도 그것도 방문이고/ 보험회사 직원이 초인종 누르는 것도 방문이고/ 맞장 뜨러 들어가는 것도 방문이고/ 그래서 방문에는 축복의 개념이 없어요.
저는 개인적으로 심방이라고 하는 단어를 참 좋아합니다.
근데 이 심방에는 분명히 종류가 있습니다.
천사의 심방이 있고 반대로 마귀의 심방이 있습니다.
마귀의 심방은 뭡니까?
모여 앉았다하면 어느 집에 방문해서 자매들끼리 몇 명이 모아졌다하면
남 얘기로 시작해서 남 얘기로 끝납니다.
마귀의 심방은 기도로 시작하지 않기 때문에
늘 끝나고 나면 상처받는 사람이 꼭 그 자리에 생깁니다.
마귀들은 저 인간들이 기도로 시작하고 있는지 아니면 잡담으로
시작하는지 지켜보고 있다가 치고 들어옵니다.
우리 자매님들, 한 아파트에 살면서 마실을 가면서
교우 집 방문하면서 그 집 문 열면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뭡니까?
그 집 거실에 계신 어른께 인사드려야 됩니다.
그리고 무릎 꿇고 성서 말씀대로 어느 집에 가든지
먼저 그 집에 평화를 빌어 주어야 됩니다.
“주님, 오늘 이 집을 떠날 때까지 제 입을 다스려주시고 이 집을 떠날 때는
평화의 사람으로 기억되게 해 주십시오”
그런데 우리 신자들, 어느 집에 가든지 축복기도 안 하고 먼저 할 일부터 합니다.
방문 열고 들어가면서부터 수다 떱니다.
“세상에 마리아, 너 어디서 머리 볶았냐? 참 색깔 잘 나왔다.!”
하면서 예수님이 그렇게 눈길 한 번 주라고 그래도 쳐다보지도 않습니다.
성모님이 “아이구, 루시아 왔구나! 어디 나랑 눈 한 번 마주치자 ”
그래도 눈길조차 주지 않습니다.
신만 훌~렁~ 벗어놓고, 수다로 시작해서 수다로 끝내고 남 얘기 합니다.
모여 앉았다 헤어질 때 상처받는 이가 꼭 나타나는 이것이 사탄의 심방입니다.
사탄은 교묘하게 이렇게 만듭니다.
본당을 분열시킵니다. 이간질을 합니다.
대모와 대녀 사이를 원수를 만듭니다.
본당신부와 신자사이가 멀어지게 만듭니다.
그것은 사탄의 심방입니다.
그런 자리에는 얼씬도 하지 마십시오.
천사의 심방은 반대일겁니다.
여러분 주변에 개신교 신자들 여러분 집에 방문했을 때 처음부터 수다 떱디까?
개신교신자들 철저하게 배웁니다.
어느 집에 가든지 먼저 무릎을 꿇게 배웁니다.
목사님 사제관을 방문해도 먼저 용건 말하지 않습니다.
신발 벗고 들어오면서부터 무릎을 꿇고 기도합니다.
이렇게 기도로 시작된 신자들의 모임은 마귀가 건드릴 수가 없습니다.
아름다운 모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오히려 상처가 있는 곳에 그 천사들의 모임은 치유가 일어납니다.
분열이 있다가도 기도하면서 모이면 기도로 끝나면... 일치가 이루어집니다.
구약의 인간들은 철저하게 지 혓바닥을 마귀한테 내어줍니다.
그래서 늘 분열을 일으킵니다.
지 자신이 마귀한테 이용당하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골로사이서 3장 8절>
분노와 격분과 악의와 비방과 또 입에서 나오는 수치스러운 말 따위는
모두 버려야 합니다.
서로 거짓말을 하지 마십시오,
<집회서 11장 7절>
알아보지도 않고 남을 비방하지 말아라! 먼저 생각하고 그 다음에 질책하여라!
<에페소서 4장 31절> 에
모든 독설과 격정과 분노와 고함소리와 욕설 따위는 모든 온갖 악의와 더불어 내어버리십시오.
세 번째로 구약의 인간의 특징은 예수님이 우리 집에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아무리 기도해도 예수님은 우리 집을 찾아오지 않고, 오히려 못되게 구는 냉담자 저 집에만....하는 것마다 잘 되고 하는 것마다 축복을 받고...나는 그토록 기도하고 열심히 했었는데.... 아무리 기도해도 되는 게 없다!
아, 예수님 우리 집 떠났어!
예수님의 임재하심에 대해 부정합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이 오기 전에도 그토록 메시아를 기다렸지만
예수님이 오고 난 다음에 어떻게 했습니까?
처참하게 죽입니다.
그리고 지금까지도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럼 신약의 인간인 우리 천주교신자들, 방마다 거실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걸어놓습니다.
십자가를 금으로 치장해서 수십개를 걸어놓는다고 해서
그 안에 예수님이 계신 것은 아닐 겁니다.
예수님의 계신다는 의식을 하고, 예를 갖추고 살아야 됩니다.
우리 옛날에 집안에 어른이 있으면 부부들은 어른 앞에서 큰 소리 냈습니까?
못 냈습니까?
싸울 일이 있으면 “이리 나와, 이리 나와 뒷동산에 올라가서
3회전 맞짱 뜨고 내려옵니다.
그리고 들어올 때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아버지 방에 손 한 번 집어넣고
“아이고, 아버지, 방 따뜻하시죠?”
인사하고 들어갑니다.
여러분 집에 그토록 예수님 방마다 매달려 계시지만 여러분들 저녁에
얼마나 하고 주무십니까?
성모님한테 밤에 잠자리에 들기 전에 얼마나 인사를 하십니까?
제가 그전 다른 본당에 있을 때 예비자 교리반에 한 형제가 나오셨는데
그 분의 직업은 엿장수였습니다.
한 쪽 다리를 몹시 저는 옛날에는 엿판을 어깨에 메고 다녔었죠?
구루마 살 돈이 없기 때문에 엿판을 어깨에다 메고, 가위질을 하면서
엿을 팔며 다녔습니다.
그때는 1년 교리를 시켰는데 1년 내내 입고 오는 옷은 딱 한 가지, 군복에
염색한... 그런데 얼마나 냄새가 나고 쩔었는지.....
다른 예비자들이 그 옆에 앉았다가 슬그머니 딴 데로 갔어요,
아무튼 그 양반은 예비자때부터도 거의 왕따 당하다시피 했어요.
그 양반은 교리시간에 한 번도 빠진 적이 없고 교리시간에
한 번도 존 적이 없었습니다.
세례를 베드로라고 받았습니다.
그리고 한 달 있다가 교무금을 책정하는 날인데 그때 당시에 우리 본당에서 교무금 제일 많이 내는 사람이제 기억으로는 4만 5천원인가~~그렇게 내던 시절이었어요.
그 양반은 책상에 앉자마자 “신부님, 저는 따로 정하지 마세요. 제가 알아서 3만원 가져 올때도 있고 3만 천원 가지고 올 때도 있을 겁니다.
저는 깜짝 놀라서 “아니, 아저씨 그렇게 많이 낼 필요 없어요..제가 베드로씨 사는 것 이렇게 보면 2천원이나 3천원만 내면 괜찮을 것 같애”
“신부님, 교리때 가르쳐 주신것 하고 다르잖아요?”
“내가 언제 돈 많이 내라고 가르쳤어요?”
“신부님, 세례 받으면 식구가 하나 늘 것이다~~ 하셨잖아요.”
그 식구가 누구예요?
“예수님 밥값 벌어야 된다고 가르쳐주셨잖아요!”
“아, 그런 말 한 적 있지!”
“저는 예수님 밥값 벌 자신이 있어요.”
그 양반은 기어코 30날인 날은 3만원을 가져 왔고 31일인 날은 3만 천원을 교무금으로 가지고 왔어요.
열심히 가위질해서 예수님 밥값을 모은 거예요.
그때 본당신자 4천명 가운데 매일같이 예수님이 우리 집의 식구라고 생각하고 매일같이 예수님 밥값을 준비한사람은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았던 베드로씨 그 분 한 분 뿐이었어요.
미사 때도 보면 기둥 뒤에서 늘 혼자서 미사를 드렸지요.
다른 사람들은 거들떠보지도 않았어요..
평화의 인사할 때도 그냥 동네 거지 와 있는 것처럼.......
평화의 인사조차도 그분에게 하지 않았지요?
제대로 그분에게 하지 않았지요.
그러나 저는 그분을 존경하고 있었어요.
어느 날 그 형제가 “신부님, 어려운 부탁을 하나 드려도 될까요? 우리 집에 오시면 밥 한 끼 하고 해드리고 싶은데요...저희같이 누추한 집에 오실 수 있으실까요? ”
“아유, 말씀만 하세요, 가지요!”
그때 제가 있던 본당은 반은 개발이 되어서 아파트가 들어서고 반은 아직 산동네였어요.
그 양반은 산동네에 단칸방에 함석집에 고개 숙이고 들어가는 집에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는데, 본당신부가 온다고 하니까 전날에 도배를 전부 싹 하고
옷 걸때도 없는 좁은 방안에 한 쪽에는 지성소를 만들어 놓았어요.
벽에다가 흰 도화지를 붙이고, 그 도화지 위에 십자가를 딱 걸어 놓고 성지가지 꽂아놓고, 그 십자가 왼쪽 오른쪽에는 예수성심 상본, 성모님 상본을 딱 걸어 놓고 그 밑에다 성모님을 이쁘게 모셔놓았어요.
좁지만 기도하는 지성소를 만들어 놓고 예비자 교리 때 배운 그대로 살고 있었어요.
밥이 나왔습니다....돼지고기 삼겹살이 나왔는데 기도를 하고 먹으려고 하다가 제가 멈칫했지요
내 바로 앞자리에 에 금수저가 놓여있고, 국이 있고, 밥이 있고...좋은 방석이 놓여있었어요.
“조금 기다려야....누구 또 초대한 분이 계셔요?”
“아니, 신부님 기도해 주시고 드시면 됩니다.”
“그럼 이 밥은 누구 겁니까?”
그분은 아무렇지도 않게 너무너무 자연스럽게
“예수님 밥이지요!”
깜짝 놀랐어요.
그 분은 세례 받은 그날부터 예수님 밥을 떠드렸고...금수저를 준비했어요.
저는 그날 밥을 먹으면서 밥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지 어디로 들어가는지 너무너무 창피하고 부끄러워서 반 먹다가 도망쳐 나왔어요.
우리 사제관에 예수님이 계신 것을 몇 번이나 의식하면서 밥을 먹은 적이 있었는가...형식적으로 십자가 긋고
“주여, 지금 베풀어주신 은혜에 감사하나이다.”
그냥 중얼 중얼......내 입으로 들어가는 거는 열심히 챙겨먹었지만 예수님이 우리 집의 주인이신 것을 한 번도 의식을 안 했지요.
이 엿장수 아저씨가 교리 때 배운 그대로 예수님 밥을 끼니때마다 올려놓고
정말 이 식탁의 주인인 것을 그대로 가위를 쩔걱쩔걱 거리면서 예수님의 밥값을...교무금을 가져왔던 겁니다.
여러분들 예수님 밥값 여기 몇 분이나 준비하시면서 사십니까 ~답변에이어 집니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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