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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서 공석 신부님의 강론(연중 제31주일, 2011년 10월 30일)
작성자강점수 쪽지 캡슐 작성일2011-10-28 조회수415 추천수3 반대(0) 신고

연중 제31주일, 2011년 10월 30일

     마태 23, 1-12

  오늘 복음은 율사와 바리사이들에 대한 비판의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으로부터 비롯된 것이지만, 마태오 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가 새로 발족하는 교회에 필요한 말씀이라 생각하여 복음서에 넣었습니다. 교회에 봉사하는 사람들은 율사나 바리사이와 같은 처신을 하지 말라는 뜻을 담아 넣었습니다.

  복음서가 전하는 비난은 다음과 같습니다. 율사와 바리사이들은 말만하고, 실행하지 않습니다. 율법과 계명의 무거운 짐을 사람들의 어깨에 지우고 그들 자신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복장으로 자기들의 품위를 드러냅니다. 이마나 팔에 율법 구절이 새겨진 작은 갑을 매달아서 경건한 사람임을 나타내고, 옷에는 술을 달아서 권위를 과시합니다. 그들은 잔치에 가면 맨 윗자리에 앉고. 회당에서는 높은 자리를 차지합니다. 길에 나가서는 사람들로부터 인사 받기를 좋아하고, 사람들에게 스승, 아버지, 지도자 등 존경스런 호칭으로 불리기를 원합니다. 오늘 복음은 섬기는 사람이 되라는 말씀으로 끝맺습니다.

  마태오 복음서는 이 말씀을 전하면서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에서는 그런 처신이 없어야 한다고 경고합니다. 복음을 전하는 사람은 스스로 먼저 복음을 실천하고, 자기 자신의 위상을 높이고 대우받기 위한 처신을 하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복음, 곧 기쁜 소식이라 일컫습니다. 율법과 제사의례에 매달려 전전긍긍하며 살던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기쁨이고 해방이었습니다. 예수님은 하느님이 사람을 고치고, 살리며, 용서하는 분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느님이 하시는 일을 우리가 이웃을 위해 실천할 때, 하느님은 우리 안에 살아계십니다. 하느님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시게 실천하라는 율법과 제물 봉헌이었지만, 율사와 사제들이 군림하고, 행세하면서 율법은 지켜야 하는 것, 제물은 바쳐야 하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율사나 바리사이들의 복장에 대한 말씀도 오늘 복음에 있었습니다. 복장으로 다른 사람들과 차별을 만들어 존경받으려 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교회의 교직자나 수도자가 남과 다른 복장을 고집하면서, 그것으로 더 나은 대우를 사람들로부터 받는다고 생각하면, 복음이 비난하는 차별을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이고 형제자매입니다. 차별을 만드는 행위는 그 사실을 부정하고, 스스로의 우월성을 찾는 것입니다. 복장으로 차별을 만들지 말라는 복음 말씀입니다. 자기가 속하는 집단을 위한 자신의 역할을 빌미로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을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과의 차별을 만들고, 자기의 우월성을 과시하려 합니다. 남녀 성별의 차이, 출신가문이나 학벌의 차이를 우리는 차별의 원인으로 만듭니다. 차별은 인간 모두가 하느님의 자녀라는 사실과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부인합니다.

  오늘 복음은 스승이나 아버지 혹은 지도자라는 호칭을 사용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스승을 스승이라 부르지 말고,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말라는 말씀이 아닙니다, 지도자도 없는 사회를 만들라는 말씀도 물론 아닙니다. 스승, 아버지, 지도자는 모두 어떤 헌신적 봉사가 먼저 있어서 발생한 호칭들입니다. 스승은 학생을 위해, 아버지는 자녀를 위해, 지도자는 자기가 담당한 공동체를 위해 헌신하고, 봉사하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것을 하나의 존칭으로 생각하면, 봉사는 퇴색되고, 우월감과 지배권을 나타내는 호칭이 되어버립니다. 인류 역사는 강자가 약자를 지배한 역사였습니다. 신앙인의 공동체에서는 강자로 군림하는 사람이 없도록 하라는 오늘의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가 이웃을 도우면서 생명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고 생각하셨습니다. 그분은 그것이 하느님 아버지의 뜻이라고 믿었습니다. 예수님은 인류 역사 안에 새로운 질서를 발생시켰습니다. 마르코 복음서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합니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백성들을 다스린다는 사람들은 엄하게 지배하고 그 높은 사람들은 백성들을 억압합니다. 그러나 여러분 사이에는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여러분 가운데서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여러분을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마르 10, 42-43). 인류역사가 만든 질서는 다른 생명을 억누르면서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것이었지만, 예수님이 시작한 질서는 다른 생명을 섬겨서 인간이 스스로를 꽃피우는 질서입니다.

  예수님이 아버지라 부르신 하느님은 우리가 상상하던 하느님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우리를 지배하면서 순종을 요구하는 하느님을 상상합니다. 그 하느님은 당신 스스로를 긍정하며, 차별을 만드는 질서의 강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믿으신 하느님은 베풀어서 세상 만물이 존재하게 하셨고, 계속 베풀어서 이 세상에 생명의 역사가 지속되게 하십니다. 하느님은 생명을 긍정하는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차별을 만들어 군림하지 않으십니다. 세상 만물이 서로 다르고, 인간 생명의 모습이 서로 다른 것은 차별을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다양함이고 풍요로움입니다. 사계절의 다양함이 있어서 우리는 계절마다 감탄하며, 그 풍요로움을 만끽합니다. 사람들이 다양하기에 우리는 사랑하는 사람 안에 감탄스런 모습을 발견합니다. 인간이 자유를 지닌 것은 각자 자기의 창의력을 동원하여, 다양하고 풍요로운 세상과 풍요로운 삶을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주변 생명들의 다양함과 자유를 말살하지 않고 그것을 풍요로움으로 받아들일 때, 이 세상은 아름답고 우리도 참으로 행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자기 자신을 긍정하기 위해 다른 생명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신앙인은 자기 주변 모든 것 안에 베푸신 하느님의 손길을 읽어냅니다. 신앙인은 자기도 이웃에게 베풀고 이웃을 섬겨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스도인은 다양함을 차별로 전락시켜서 자기 자신을 과시하려 하지 않습니다. 다양함은 하느님이 주신 풍요로움입니다. 오늘의 복음은 그리스도 신앙은 어떤 이유에서도 사람을 차별하거나 다른 사람 앞에 자기의 우월성을 드러내려 하지 말라고 말합니다. 오늘의 교회가 예수님의 말씀에 충실하기 위해서는 자기반성을 뼈아프게 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의 제도와 관행은 신분의 차별이 당연시되던 유럽 중세 봉건사회의 구조를 이어받았습니다. 복장과 호칭으로 차별하던 사회구조입니다. 그것은 오늘 예수님이 여신 섬김의 질서를 은폐합니다. 우리가 반성하고 청산해서 섬김을 기본으로 한 그리스도적 질서가 나타나게 해야 합니다. 신앙은 섬김을 배워 실천하여 은혜로우신 하느님의 자녀로 사는 길입니다. ◆

 서공석 신부님의 강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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