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성공적인 인생 순례여정을 위하여 - 10.3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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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1-10-30 | 조회수326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1.10.30 연중 제31주일 말라1,14ㄴ-2,2ㄴ.8-10 1테살2,7ㄴ-9.13 마태23,1-12
성공적인 인생 순례여정을 위하여
새벽 배 밭 사이 길을 걷다가 문득 떠오른 말이 ‘길은 어디에?’였습니다. 길을 잃어 방황이요 길이 막혀 절망입니다. 실제 길을 잃었을 때 그 당황스러움은 경험한 사람은 다 알 것입니다.
인생 여정이라 합니다. 길을 찾는 사람이라 하여 구도자요 길을 닦아가는 자라 하여 수도자라 합니다. 길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길 위의 사람들입니다.
얼마 전에 사랑하는 동료 수도자에게 들은 산티야고 순례기는 늘 상기해도 새롭습니다. 산티야고에 가지 않고도 저는 핵심 진리를 마음 깊이 새겼습니다. 하여 피정 강론 때 마다 자주 예로 들어도 새로운 감동입니다. 오늘 말씀을 묵상하면서 떠오른 것도 산티야고 순례기였습니다.
800km, 2000리 백두산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30일 동안 걸었다 합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후 즉시 깨달은바 진리는 ‘삶은 순례’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삶을 그대로 압축하고 있는 산티야고 순례였습니다.
30일 동안의 순례 여정이 아니라 죽어야 끝나는 하느님 향한 여정의 순례라는 것입니다. 과연 어떻게 하면 성공적으로 인생 순례 여정을 마칠 수 있겠는지요? 오늘 탐구할 강론 주제가 되겠습니다.
첫째, 희망의 이정표입니다.
산티야고 순례했던 동료 수도자에게 순례가 힘들지 않았는가 물었습니다. “보람이 있어 힘들지 않았습니다. 가는 곳 마다 ‘산티야고’라는 이정표가 힘을 북돋아 주었습니다.” 라는 대답에서 즉시 저는 우리 인생 순례의 목표인 하느님을 연상했고 그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정표를 생각했습니다.
영적 순례에는 내비게이션 같은 그런 편리한 안내자가 없습니다. 스스로 하느님 이정표를 보고 찾아가야 합니다. 눈 만 열리면 곳곳에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정표입니다.
길 잃은 이들이 북극성을 보고 다시 길을 찾아가듯, 언제나 그 자리의 북극성 같이 하느님 이정표 역할을 하는 여기 하느님의 집인 수도원입니다. 하여 많은 이들이 하느님 이정표를 확인하기 위해 수도원을 찾습니다.
매일의 미사가 하느님 향한 이정표입니다. 좋은 믿음의 벗 역시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정표가 됩니다. 단풍 짙어져가는 아름다운 자연 역시 우리 삶의 여정 중 어느 계절에 왔는지 살펴보게 하는 이정표 역할을 합니다.
이런 이정표가 가리키는 한결 같은 하나의 목표는 희망의 하느님입니다. 이런 이정표들이 우리에게 희망을 불러일으키기에 순례여정도 탄력이 붙습니다.
산티야고 순례 중 정말 힘들고 어려웠을 때 이정표를 볼 때 마다 마음에 희망과 보람이 물결치고 힘이 솟았다는 동료 수도자의 고백이었습니다.
희망의 눈의 열려야 곳곳에서 발견되는 하느님 이정표들입니다. 그러니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해야 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 비로소 희망의 눈이 열려 발견되는 하느님 향한 희망의 이정표들입니다.
둘째, 사랑의 도반들입니다.
희망의 이정표에 이어 도반들이 있어 산티야고 순례가 가능했다는 고백이 또 잊혀 지지 않습니다. 혼자 가기에, 사랑이 없어 외로운 인생입니다. 혼자, 사랑 없이는 산티야고 순례는 불가능하듯이 인생 순례도 똑 같습니다.
2000리 산티야고의 순례 길 나라도 말도 다른 이들이 이심전심 사랑을 나누며 하느님 목표를 향해 도반들이 되어 걸었다는 것입니다. 말은 통하지 않아도 마음은 사랑에서 하나가 되어 순수했기에 불편도, 외로움도 없었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순수하게 하는 것은 사랑뿐이며 이 사랑 있을 때 말은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산티야고 순례 길, 함께 했기에 가능했지 혼자서는 어림도 없었다는 고백입니다. 이정표 역할까지 하는 사랑의 도반들입니다.
사랑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도반들입니다. 사랑의 도반들은 그대로 하느님을 가리키는 이정표들이요 이들을 볼 때 마다 위로와 힘을 얻어 또 순례 길에 오를 수 있을 것입니다.
정말 순례영성에 정통한 이들은 겸손하고 사랑이 많습니다. 허영이 없고 진실하며 교만이 없고 진실합니다. 겸손하고 진실한 사랑의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 한분만이 진정한 가이드이자 스승이시고,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늘에 계신 그분뿐이며 우리 모두는 순례여정 중의 형제들임을 알기에 저절로 겸손과 사랑으로 도반인 형제들을 섬깁니다.
영성의 최고봉이 섬김의 영성이요 이의 모범이 사도 바오로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고백이 감동적이라 길다 싶어도 다 인용합니다.
“우리는 자녀들을 품에 안은 어머니처럼 온화하게 처신하였습니다. 우리는 이처럼 여러분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하느님의 복음을 나눌 뿐만 아니라 여러분을 위하여 우리 자신까지 바치기로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그토록 우리에게 사랑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여러분 가운데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으려고 밤낮으로 일하면서, 하느님의 복음을 여러분에게 선포하였습니다.”
이웃을 네 몸 같이 사랑하라는 주님 계명을 도반 형제들에게 그대로 실천한 사도 바오로 참 좋은 하느님의 이정표입니다.
여기서 주목할 반가운 단어가 온화(穩和)함입니다.
사전은 ‘성질이나 태도가 조용하고 부드러움’으로 소개되었으나, 주석은 ‘아무나 가질 수 없는 특별한 덕으로 권한과 권위를 지닌 이들, 그러면서도 손아랫사람들에게 군림하지 않는 이들만이 지닐 수 있는 것이다.’라고 소개되었습니다.
정말 닮고 싶은 온화함의 덕입니다. 사도 바오로와 같이 이런 온화함을 지닌 교회의 지도자라면 하느님을 가리키는 최고의 이정표일 것입니다.
이와 대조적인 게 말라키 예언자에게 지탄을 받는 사제들입니다. “그러나 너희는 길에서 벗어나 너희의 법으로 많은 이를 넘어지게 하였다. 너희는 나의 길을 지키지 않고 법을 공평하게 적용하지 않았다.” 오히려 도반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정표의 도움이 되기는커녕 걸림돌이 된 사제들입니다.
셋째, 믿음의 여정입니다. 30일의 산티야고 순례와는 달리 평생 믿음의 순례 여정 중인 우리들입니다. 동료수도자들의 다음 말도 생생합니다.
“계속 새롭게 바뀌는 환경이 여정에 큰 활력이었습니다. 단조롭게 반복되는 똑같은 환경이었으면 참 힘들었을 것입니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지평선이 계속되었으나 그 지평선이 끝나면 전혀 새로운 환경의 지평선이 열려 늘 새로운 여정의 느낌이었습니다.”
이런 외적 순례 여정이 아닌 내적 순례 여정에서 어떻게 하면 늘 새로운 지평의 환경을 살 수 있겠는지요. 늘 반복되는 일, 늘 같은 환경, 늘 같은 사람과의 만남 중에 어떻게 하면 늘 새 하늘, 새 땅의 지평을 살 수 있겠는지요.
믿음의 눈이 열려야 새로운 지평입니다. 우리의 내적 순례여정은 믿음과 인내의 여정입니다. 항구하게 하느님을 향해 믿음으로 인내하며 걸어가야 하는 내적 순례 여정입니다.
믿음의 눈이 열릴 때 하루의 지평이 끝나면 또 새로운 지평의 새 하늘과 새 땅의 하루가 펼쳐집니다. 설레는 마음으로 새 날을 맞이합니다.
이래서 끊임없는 기도와 말씀 묵상입니다. 기도와 말씀을 통한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 믿음의 눈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마음이 새로우면, 마음의 눈이 열리면 모두가 새롭습니다.
바꿔야 할 것은 환경이나 사람이 아닌 우리 마음입니다.
바로 매일 믿음으로 바치는 공동미사전례가 하느님 이정표 역할을 하면서 우리에게 새로운 지평을 열어줍니다.
오늘 주님은 오늘 우리에게 성공적인 인생 순례 여정의 방법을 알려 주셨습니다.
1.늘 희망의 하느님 이정표를 바라보십시오. 희망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하느님 향한 이정표들입니다.
2.늘 사랑의 도반들과 함께 하십시오. 사랑의 눈만 열리면 모두가 도반들입니다.
3. 늘 믿음의 여정에 항구하십시오. 믿음의 눈만 열리면 계속 새롭게 열리는 지평입니다. 믿음의 눈만 열리면 매일이 새 하늘, 새 땅의 새로운 지평입니다.
주님은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우리 모두에게 위로와 힘을 주시고 새로운 지평을 열어 주시어 당신 찾는 순례 여정에 항구할 수 있게 하십니다. “주님,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치시니, 당신 얼굴을 뵈오며 기쁨에 넘치리이다.” (시편16,11).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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