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미사

우리들의 묵상/체험

제목 모든 성인 대축일 - 감곡매괴성모순례지 영성(2) - 성모님께서 친히 잡으신 터[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1-11-01 조회수397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이곳은 다섯 가지의 영성과 네 가지의 열매와 한가지의 의무가 있는

5, 4, 1 성지라고 합니다.

 

첫 번째 영성 따라 하십시오.

114년 전에 성모님께서 친히 잡으신 터입니다.

 

그것이 바로 이곳의 첫 번째 영성입니다.

누가 잡았다구요?

성모님.

 

교구청에서 복덕방을 내세워 잡은 터가 아니라

성모님께서 사제 한 사람을 도구로 쓰셔서 동양의 루르드 성지로 만드시기 위해서

114년 전에 성모님이 직접 개입하신 땅이 바로 여기예요.

 

 

그때 성모님의 도구로 쓰였던 신부님은 루르드의 임가밀로 신부님.

오늘이 바로 임가밀로 신부님 기일 62주년 되는 해입니다.

 

1947년 10월 25일, 바로 오늘이 돌아가신 날이고

오늘 저녁미사 후에는 신자들이 다 모여서 임신부님 연도를 바칠 거예요.

 

임신부님은 고향이 어디라고 하셨죠?

루르드예요.

성모님은 루르드 출신 신부님을 선택하셨어요.

 

임신부님은 놀이마당이 루르드였겠지요.

어렸을 때부터 성모신심과 성체신심을 믿음 깊은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컸습니다.

사제가 되는 게 꿈이었기 때문에 파리 외방전교회입학을 해서

신학공부를 하고 1897년에 사제가 되어 조선 땅으로 선교 나가라는 명령을 받습니다.

 

 

조선 땅으로 선교 나오기 전에 다른 선교사들이 그렇듯이 선교사들은

봉쇄수녀원에 찾아가서 기도를 부탁합니다.

리지에에 있는 깔멜수녀원에 찾아가서 미사를 드리는데 유난히 눈에 들어오는 수녀가 있었어요.

조각처럼 예고 앳되게 생개셨는데 그 수녀님의 머리 뒤에는 하얀 후광이 비췄데요.

 

수녀님은 그 유명한 소화데레사 성녀였죠.

 

임신부님보다 네 살이 아래였고 임신부님과 소화데레사 성녀는

영적인 남매를 맺고 서로 편지를 주고받았습니다.

그래서 소화데레사 성녀의 기억 속에는 오라버니가 사목하고 있는

장호원 성당을 기억하고 있었다 이겁니다.

 

 

한국교회와 소화데레사 성녀는 임신부님을 통해서 특별한 인연이 맺어졌고 

1925년에 소화데레사 성녀가 성녀 품에 오르자마자 임신부님은

프랑스에서 지금 저 위에 올라가있는 저 소화데레사 상을 만들어다가

지금 저 자리에 모셔놓고 틈만 나면 마루에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셨어요.

 

여러분들 박물관에서 임신부님의 금제의를 보셨을 겁니다.

박물관 1층에 있죠?

그 금제의 옆에 보면 흑백사진이 세장이 붙어있는데

 

그 중에 사진 하나가 저 소화데레사 사진 밑에서 기도하는 임가밀로신부님 사진을 보셨을 겁니다.

 

 

소화데레사 성녀는 우리 감곡성당, 옛날의 장호원성당하면

‘아, 그 오래 된 성당?

6.25때 총알 맞으셨던 성모님 계신 그 성당 그 성당?

성모님이 눈물을 흘리셨던 그 성당?

성체대회가 처음 있었던 그 성당?

지금도 달력을 만들 때 감곡성당(옛 장호원 성당) 이라고 표시해 주지요.

 

임신부님의 무덤은 지금 예수성심상 제대 밑에 있습니다.

 

산에서 내려오다가 빈 무덤 보셨지요?

거기 묻혀계시다가 1983년도에 제대위로 예수성심상 제대로 옮겼어요.

 

 

무덤 속에서 임신부님의 뼈와 같이 말라 쪼그라붙은 구두가 나왔어요.

임신부님은 이 성당에서만 51년 동안 사목하셨는데 한평생을 구두 한 켤레로 사셨어요.

깁고 또 깁고...돌아가실 때에도 그 누빈 구두를 신고 돌아가셨고

땅 속에 묻혀 있다가 뼈는 이곳에 묻고, 쪼그라 말라붙은 구두를 박물관 2층에 가셔서 보셨을 겁니다.

 

구두라고 다 똑같은 구두가 아닙니다.

여러분 구두 오래 신으면 박물관 보냅니까?

임신부님은 저 구두 하나로 가지고 조선팔도를 하느님 복음전파를 위해 애쓰셨기 때문에

저렇게 낡은 구두라고 하더라도 박물관에 보존이 되는 겁니다.

 

 

임신부님은 여기저기 성당터를 보러다녔는데 여주에서부터 말을 타고

저 앞에 있는 강을 따라서 장호원 쪽으로 들어오다가 고개를 들어 뒷산을 보았더니

산의 모습이 마치 성모님의 치맛자락 같았다고 그랬어요.

 

산 오른 자락을 보니 대궐같은 집이 하나 있었는데 109칸짜리였어요.

그 산과 집의 임자는 바로 명성황후의 조카 벌되는 민흥식대감의 집이었어요.

 

매괴 중고등학교 터 전체가 109칸 짜리 대궐같은 집이 있었던 그 터였습니다.

 

임신부님은 이 산과 그 집을 너무너무 갖고 싶었어요.

‘저걸 사서 성당을 짓고 싶다!’

성당을 지으려고 이 산과 저 터를 사려고 했지만 민흥식이 돈이 없습니까?

권력이 없습니까? 팔 생각이 없었지요.

그래서 얼마를 불렀느냐?

지금 돈으로 환산해서 400억을 달라고 했습니다.

 

 

선교사가 400억이 어디 있었겠습니까?

그래도 임신부님은 굴하지 않고 성모님께 매달렸습니다.

 

프랑스에서 떠나올 때 임신부님의 친엄마가 주머니 속에 성모님의 무염시태 기적패를 싸주시며

‘신부님, 조선에 가서 어려울 때마다 이 기적패를 쓰십시오!’

 

신부님은 엄마가 준 그 기적패를 밤중에 몰래 민흥식의 집 귀퉁이

20군데에다가 땅을 파서 성모님의 기적패를 묻고 기도했어오,

‘성모님, 이 산과 이 집을 주시면 저는 평생 성모님의 종이 될 겁니다.

그리고 이곳에다가 매괴성당을 지어드리겠습니다’

 

 

기도한지 1년 3개월이 되었을 때 을미사변이 일어납니다.

을미사변이란 일본자객들이 민비를 시해한 사건으로

전국에서 의병이 일어나 일본수비대와 맞붙어 싸웁니다.

 

이곳 감곡에서도 싸움이 일어났는데 민흥식의 집에 불이 납니다.

 

명성황후가 죽고 나니까 민흥식은 관직을 빼앗기고 서울로 끌려가면서

자기 식솔들에게 ‘양대인에게 이 산과 이 집을 넘겨라!’

급하게 매맥계약서를 써서 19만원에 집과 산을 넘겨 줍니다.

 

기적패를 묻은지 1년 4개월 만에 이 6만평을 성모님이 거저 주신 겁니다.

 

불타다 남은 지붕 위에다가 십자가를 세우고 첫미사를 드린 날이

이 본당의 설립일인 1896년 10월 7일 로사리오 기념일입니다.

 

그 첫미사에 모였던 장호원 신자들이 무려~ ‘3명’ 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성당터는 성모님이 주신 땅입니다.

 

기적패는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쓸 때만 기적패가 엄청난 힘을 발휘하는 거지~

자기 사리사욕 쓰는데 기적패를 쓰는 게 아닙니다.

 

 

첫 번째 성당에서 3명의 교우로 시작했는데 1년도 안 되어서

신자들이 500명으로 늘어나 그 옆의 마당에다 성당을 짓고 1903년에 축성을 합니다.

그 두 번째 성당이 우리나라로 전체로 볼 때 우리나라의 3번째 성당입니다.

 

그 성당에서 1920년까지 미사를 드리는데 다시 1500여명으로 늘어납니다.

도저히 그 성당으로 감당이 안 되어서 1920년에 10년에 걸쳐 지금 이 성당을 짓습니다.

그래서 이 성당은 1930년에 축성이 됩니다.

 

 

원래 이 성당을 설계할 때는 서울에 있는 명동성당과 똑같은 쌍둥이 성당이었습니다.

명동성당은 중부이북으로 선교하는 성당이고

이 장호원 성당은 중부이남을 향해서 선교하는 성당이었습니다.

 

 

모양은 명동성당과 똑같은데 왜 이렇게 성당이 작아졌는가?

이유는 일본인들이 프랑스 선교사가 성당을 짓는 꼴을 봐 줄 수가 없었습니다.

성당을 못 짓게 하느라고 자재 반 이상을 총칼로 빼앗았습니다.

자재부족으로 성당이 반으로 줄어들었지요.

 

 

이 성당을 축성한 뒤 2년 후에 빼앗겼던 그 자재를 다시 찾아서 저 박물관을 지었지요.

5년 전만 하더라도 사제관이었는데 저렇게 박물관으로 리모델링한 겁니다.

저 박물관은 중부지방 최초의 석조건물입니다.

 

저 박물관에 들어있는 모든 자재들이 이 성당에 다 들어갔으면

이 성당은 명동성당과 똑같은 쌍둥이 성당이 되었을 겁니다.

이 성당은 현재 충청북도 도 문화재 188호입니다.

 

이곳의 첫 번째 영성은 사람이 잡은 터가 아니라 성모님께서 친히 잡은 터입니다.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더블클릭을 하시면 이미지를 수정할 수 있습니다

    배티 성지 - photo by 느티나무 신부님

 

        

 

 

 

                        
                                        

                                      

 

 

 
 
태그
COMMENTS※ 500자 이내로 작성 가능합니다. (26/500)
[ Total 27 ] 기도고침 기도지움
등록하기
※ 로그인 후 등록 가능합니다. 파일 찾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