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압을 이용한 치아세정기를 사용할 때마다 드는 의문이 있었다. 왜 물을 분사하는 노즐부분이 네 개나 있는 것일까? 전동칫솔처럼 솔이 마모되면 교체를 해야만 하는 소모품이라면 모를까 거의 반영구적으로 쓸 수 있을 것 같은 물 분사부분이 네 개나 들어있는 이유가 한 동안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였다.
그 수수께끼는 한참 뒤 티비를 보다가 우연히 풀리게 되었다. 티비 속 영화의 한 장면에서 어떤 젊은 부인이 남편이 쓰던 노즐을 뽑아내고 다른 것으로 교체해서 쓰는 장면을 보게 된 것이다. 그제서야 나는 보통의 경우 치아세정기는 혼자서 쓰는 것이 아니라 가족들이 공동으로 쓰는 물품임을 깨닫게 되었다.
혼자서 살아가다보니 어떤 사물이나 현상을 대할 때 저절로 ‘나’ 혼자만을 중심으로 바라보고 이해하게 되는 경우가 많다. 아침에 태양이 뜨는 이유도, 밤하늘에 별이 빛나는 이유도 오로지 ‘나’ 때문에, ‘나’만을 위해서 그러하다고 느낄 때가 많다. 그러면서 나는 외롭다고 말한다.
굳이 인간 존재의 저 심연 속에서 죽음과 같은 침묵으로 나를 따르는 ‘존재 차원의 절대적 고독’과 분리해서 생각해 보자면 ‘외롭다’는 것은 ‘관계 차원의 상대적 고독’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전자前者가 신神과의 관계를 위해 애초 창조 때부터 배려된 정신적이고 영성적인 ‘비어있음’(空)이라면 후자後者는 인간들 사이의 관계에서 올 수 있는 ‘너’라는 인연의 부재不在를 가리킨다. 그래서 맹자가 말했던 ‘어려서 부모가 없는 것을 고孤라 말하고, 늙어서 자식이 없는 것을 독獨이라 한다’는 고독에 대한 정의는 ‘외로움’이라는 감정에 관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나는 감정적인 인연의 부재로서의 ‘외로움’과 인간으로 하여금 비로소 신에 대한 사유를 가능케 하는 영성적 ‘비어있음’으로서의 ‘고독’을 분리해서 생각한다. 고독은 피할 수가 없다. 탄생과 동시에 이미 죽음이 피할 수 없이 전제되어 있는 우리 삶의 일부분이 된 것처럼 고독 역시 자연스러운 우리들 삶의 일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아니, 더 나아가 적극적으로 고독을 선택함으로서 아무것도 채워지지 않은 영혼의 빈 공간 속에서 하느님과의 더 깊이 있는 만남을 체험해야 한다.
하지만 외로움은 다르다. 흔히 외로움을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감정의 장난쯤으로 생각하는데 사실은 자신도 모르게 빠져드는 외로움이란 없다. 외로움은 마음속에서든 현실 속에서든 특정의 인연을 만들었을 때 이미 예견되고 그 특정의 인연이 내가 원하는 곳에, 내가 원하는 대로 ‘있지 않을(不在)’ 때 구체적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외로움을 피하는 법은 의외로 쉽다.
첫째, 특정의 인연을 만들지 말라. 살아가면서 어디 그것이 가능하냐고 따지는 사람이 있다면 그런 사람들을 위해 둘째, 그 특정의 인연을 당신 마음대로 움직이려 하지 말라.
피할 수 없이 특정의 인연을 만들게 되었다면 그것이 부모든지, 자식이든지, 아니면 연인이든지 그 상대가 당신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게 하려들지 말라는 말이다. 만약 그렇지 않으면 당신은 틀림없이 외로워진다. 당신이 신이 아닌 이상 우주 삼라만상森羅萬象을 당신 맘대로 움직일 수 없듯이 한 소우주小宇宙로서의 인간 역시 결코 당신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다. 당신이 외로움을 피하면서 특정의 인연을 상대로 할 수 있는 것은 마치 밤하늘의 별을 보듯이 환하게 빛나는 상대의 존재를 그저 바라보는 것뿐이다.
이렇게 말없는 침묵 속에서 특정의 인연을 바라보기란 결코 쉽지 않은 작업이다. 고독하지 않은 자, 그러니까 영혼의 빈 공간 안에서 하느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을 통해 얼마나 그 분께서 영원과 같은 침묵 속에서 나를 기다리면서 지켜보고 계시는 지를 처절하게 통감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외로움을 피하는 법 셋째, 하느님과의 대화를 시작하라. 예수는 자신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라는 군중들의 외침 속에서도 결코 외롭지 않았다. 그 분은 언제나 고독하셨으니까......
“나를 보내신 분은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시지는 않는다. 나는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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