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법 깊은 밤, 잠 못 들어 몇 번 뒤척이다가 이내 불을 켰다.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고 누워있는데 반투명 형광등 케이스 안에서 뭔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것이 있었다. 머리, 네 다리 거기다 긴 꼬리까지...... 희미한 형체만 봐도 그 독특한 생김새 때문에 그것이 도마뱀이라는 것을 알아내기는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로마시내 한 가운데 있는 집 4층에 위치한 내 방까지, 게다가 들어갈 틈새도 없어 보이는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케이스까지 어떻게, 웬일로 기어들어갔을까? 아마 빛을 쫒아서 날아 들어간 조그만 날벌레들에 집착한 탓일 것이다. 한참을 들여다보고 있노라니 케이스의 이쪽 끝과 저쪽 끝을 번갈아 오가는 것이 형광등의 열 때문에 너무 건조한 그 곳을 다시 빠져나가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는 것 같았다.
어떻게든 그 놈의 탈출을 도와주고 싶었지만 한국 보통 가정집의 두 배 높이에 달하는 천장에 매달린 형광등 속의 그 놈을 그 새벽에 어떻게 도와줄 수 있겠는가? 내가 도와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빨리 불을 꺼서 그 놈 몸이 말라가는 것을 더디게 해주는 것 뿐 이었고, 그 놈은 얼마 안 되는 시간 동안 빨리 그 곳을 탈출하는 길 밖에는 없었다.
날이 밝고 미사를 드린 뒤에 방에 다시 올라왔을 때까지도 그 놈은 여전히 형광등 케이스 안에 갇혀 있었다. 하지만 저녁 7시가 조금 넘어 내가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이미 그 놈은 움직이지 않는, 움직일 수 없는 물체로 변해 있었다. 들어갔으니 나올 수도 있었을 텐데......
살면서 어떤 것에 집착하여 점점 빠져들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그만 낯선 곳에 갇혀버린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시간은 자꾸 흘러가고 답답한 그곳에서 하루 빨리 빠져나가고는 싶은데 나갈 길을 찾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말이다. 이런 때 가장 쉽게 탈출할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집착을 버리고 자기가 들어온 길을 따라 원래의 자기 자리로 되돌아가야 살 수 있다. 다른 길을 찾아 헤맬수록 점점 더 깊은 미로에 빠져들거나 기껏해야 제자리를 맴돌 뿐이다. 들어온 길로 나가는 것이 가장 정확하고 빠르다.
그래서 평상시 자기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수시로 묻고 확인하는 일이 중요하다. 이 일을 제 아무리 열심히 한다 해도 어느 한 순간의 집착에 눈이 멀고 귀가 닫혀 스스로를 가둬버리는 것이 인간이다. 하지만 수시로 자기가 가고 있는 길을 물었던 사람은 자신이 어디서부터 길을 잃고 헤매다가 이렇게 꼼짝없이 갇히게 됐는지를 알 수 있고 그 자리로 돌아가 새로운 생명을 시작할 수 있다. 모든 일의 첫마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부활이다.
자기가 들어온 길조차 잃어버린 채 갇혀있다면 큰 문제다. 이런 경우에 할 수 있는 것은 또 단 한 가지, 더 이상 불필요한 에너지를 낭비하지 말고 그 자리를 그대로 지키면서 다른 존재에게 자신의 처지를 알리고 구조를 기다리는 것뿐이다. 기도는 칠흑같이 어두운 밤바다를 표류하는 뱃사람들이 쏘아 올리는 조명탄과 같다. 기도만큼 환하고 분명하게 하느님의 도우심을 구할 수 있는 것이란 없다. 그래서 기도는 생명이다.
정말 더 큰 문제는 집착이라는 방에 갇혀 있는지도 모른 채 점점 더 좁은 방으로 향하는 창살문을 하나씩 통과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손발 하나 까딱할 수 없이 묶이는 죽음이라는 방 앞에 가서야 울고불고 후회하며 뒤돌아가려고 하지만 그때는 이미 늦었다.
결국 죽는 것은 다 같은 것 아니냐고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을지 모르겠다. 도마뱀도 죽고 사람도 죽고 어차피 살아있는 모든 것은 죽음을 비켜갈 수 없거니와 죽음도 원래 왔던 곳으로 ‘돌아가는 일’이니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나는 지금 도마뱀이 아닌 사람들에게, 도마뱀의 본능이 아니라 사람의 본성으로 '사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내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군중을 보내신 뒤에 조용히 기도하시려고 산으로 올라가셔서 날이 저물었는데도 거기에 혼자 계셨다.”(마태14,23)
한국외방선교회 최강 스테파노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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