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복음에 대한 짧은 생각] 2011120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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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용현 | 작성일2011-12-09 | 조회수321 | 추천수1 | 반대(0) 신고 |
2011년 12월 9일 대림 제2주간 금요일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6-19 그때에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말씀하셨다. “이 세대를 무엇에 비기랴? 장터에 앉아 서로 부르며 이렇게 말하는 아이들과 같다.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사실 요한이 와서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자, ‘저자는 마귀가 들렸다.’ 하고 말한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그러나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 ‘우리가 피리를 불어 주어도 너희는 춤추지 않고, 우리가 곡을 하여도 너희는 가슴을 치지 않았다.’ 어찌 말하여도 정답이 되지 않는 세상. 하느님이 오셔도 하느님이 정답이 되지 않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하느님을 믿고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다는 단 하나의 단어 아래 정작 삶은 자신들의 처지로 해석하고 자신들의 법으로 하느님을 만들어 내는 사람들의 모습 속에서 하느님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눈 앞의 하느님을 보고서도 보지를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상태가 되어 버렸습니다. 또한 어떤 모범도 삶의 기준으로 받아들일 수도 없는 꽉막힌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하느님 앞에서 완전한 겸손을 이야기하면서도 세례자 요한처럼은 살지 못하겠노라 말합니다. 하느님께 모든 것을 맡기고 살겠다 하면서도 정작 그리 사는 사람을 자신들과 너무나 다른 특별한 사람으로 만들거나 상종하지 못할 마귀들린 이로 만들어 버려 자신들에게서 떼어 내어 버립니다. 우리와 다른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런데 정작 주님이 사람들 사이에 와서 사셔도 사람들은 그분의 곁에 가기를 주저합니다. 그리고 그분을 자신들이 생각할 수 있는 하느님과 가장 먼 사람으로 취급하려 듭니다. 하느님이신데도 말입니다. 그런데 사람의 아들이 와서 먹고 마시자, ‘보라, 저자는 먹보요 술꾼이며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다.’ 하고 말한다. 하느님이 오셔도 하느님으로 보이지 않는 세상. 그렇게 자신들의 이기적인 장벽 안에서 사는 이들 안에 계신 하느님은 그럼에도 그들을 구하시려는 의지를 꺽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세상의 안쪽에서 가장 보잘것 없고 가장 하느님과 거리가 먼 이들 사이에서 하신 일들로 하느님을 드러내십니다. 참 지혜는, 참 신앙은 그렇게 삶과 붙어 있어서 누구도 '나와 상관없다' '나 같은 사람은 아니다'라고 말할 수 없게 만듭니다. 삶이 없는 신앙은 존재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삶이 신앙을 드러내주는 증거가 됩니다. 하느님은 우리 삶 안으로 오셨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삶 속에 하느님의 말씀과 연결되지 않는 것이 단 하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습니다. 말씀이 사람이 되어 우리와 함께 계셨다는 것은 우리 안에 특별한 분이 되셨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자신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한 없이 하느님을 밀어내는 사람들, 그러면서 구원의 보증 정도로만 하느님을 세워두려는 시도를 하느님의 사랑이 한 번에 극복해버린 셈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삶에서 하느님을 밀어내려는 시도는 아직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하느님은 이름만으로 사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하느님 앞에선 자세로 살든지, 하느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삶을 살든지 모든 것은 참으로 살아계신 하느님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례자 요한처럼 하느님 앞에 선 사람으로 살고,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거룩함을 지닌 사람으로 살아야 함을 잊지 말았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은 성당에서가 아니라 숨쉬는 모든 순간에 그래야 합니다. "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하느님은 단어가 아니라 삶입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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