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제가 군종신부를 여러 해 동안 했는데
군종사회에서 저에게 얽혀 내려오는 전설 같은 이야기 하나가 있습니다.
저는 1개 대대를 한꺼번에 세례를 준 적이 있습니다.
연병장에 가득히 모아놓고 대대장서부터 중대장 간부들, 사병들까지 한꺼번에 다 주었어요.
워낙 사람들이 많으니까 한 사람 한 사람 불러다가 세례를 줄 재간이 없었어요.
그래서 성수를 축성해서 성수 뿌리는 걸로 다니면서 뿌렸지요.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이름은 각자 대라!”
그날 돼지 두 마리를 잡아서 거하게 잔치를 끝내고
찦차를 몰고 위병소를 빠져나오려고 하는데 사병 아이 하나가
제 차 앞을 가로막는데 그 표정이 너무너무 심각하고 울상이야!
“너 이렇게 좋은 날, 세례 받고 왜 이래?”
“신부님, 저 오늘 세례 못 받았어요. 제 옷에는 아무리 봐도 물 한 방울 안 튀었어요.”
“알았어~ ”
위병소 안으로 들어가서 노란 큰 주전자에다가 물을 하나 떠가지고 와서
축성을 한 다음 “너 머리 들이밀어~ ”
그 큰 노란 주전자 물 하나 다 부었어요.
그 날 물을 많이 부어서 그런지 효과가 있습디다.
그 아이는 군대 제대하자마자 신학교를 들어가서 지금 서울에서 신부생활을 하고 있어요.
오늘 기찬 밤에 북방선교에 대해 설명하고 부탁도 드리고자 합니다.
북방선교라고 하면 넓게는 중국과 소련을 의미하고
좁게는 북한을 의미한다고 생각하면 맞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한국 교회에 북방선교를 부탁하셨어요.
그러나 북방선교에 대해서 관심은 있지만 어떻게 참여해야 되는지
모르기 때문에 사실은 우리에게는 멀리만 있는 이야기처럼 들릴 겁니다.
저는 감사하게도 90년대에 중국에 있는 9개 본당을 피정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 가운데 조선족 5개 본당, 훈춘, 도문, 명성, 차조쿠, 연길본당
중국인 본당 4군데를 피정시켰는데 우순, 심양, 삼경로, 소팔가자본당
평균 3일씩 피정을 시킬 수 있었습니다
제가 중국선교를 떠날 수 있었던 것은 ‘한겨레 복음선교단’ 이라고 하는
천주교 유일의 북방 선교단체가운데 당시에 제가 지도신부로
관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녀올 수 있었습니다.
물론 교구의 허락은 받았지만 재정적인 지원은 거의 없었고
회장님들이 사비를 털어가면서 선교하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저도 동참하기를 원했습니다.
한국 신부로서는 처음으로 피정시켰기 때문에 개인적으로는 그때가
너무 은혜롭고 감사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중국과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정치경제적으로 깊은 관계가 있습니다.
중국 13억 인구 중에는 소수민족 150개가 있는데 그 가운데 조선족은 230만명이고
연변지방에만 100만 명이 살고, 나머지는 중국대륙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중국선교의 대상은 한족과 조선족입니다.
중국인을 한족이라고 부르는데 생김새는 비슷하지만
언어와 문화가 다르고, 종교심성도 다릅니다.
조선족이라고 하는 사람들은 일제시대에 만주로 이주했던 한국사람들이지요.
2세나 3세가 대부분이었고, 대부분은 함경도가 고향이고 뿌리입니다.
그들은 사고방식이나 풍습이 중국화 되어 있는 부분이 많았습니다.
중국은 사회분위기가 전제주의에서 자본주의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진통을
겪고 있는 나라입니다.
모택동 시절에는 똑같이 일하고 똑같이 나누어 먹는 평등한 시절이었지만
등소평의 개방 이후에는 관료들의 부정부패와 국민들의 패배의식이 만연해 있었고,
옛 모택동 시절을 그리워하는 사람들도 그 당시에는 참으로 많았습니다.
돈이 있으면 안 되는 것이 없는 화폐의 천국이었습니다.
택시마다 기사와 손님 사이를 쇠창살로 막아서 강도를 막는 살벌한 분위기였습니다.
체제와 사상 때문에 아무것도 모르다가 갑자기 열린 개방으로
도덕과 윤리의 부재상태가 90년대 이후 10여년간~ 혼란한 기간이었습니다.
도시는 현대와 근대가 뒤섞여 있는 모습이었고
고급 리무진서부터 폐차 시켜야 하는 차가 공존하며
컴퓨터와 주판이 같이 대접을 받는 시절이었습니다.
많은 건물을 짓고 있었고, 활기차 보이기는 했지만 평균 성장률 9%라고 하는
것과는 다르게 많은 공장과 회사가 문을 닫고 있었습니다.
시골의 모습은 한족과 조선족이 사는 동네가 구분되어 있었고
조선족이 사는 동네는 한국의 60년대 초를 생각게 하였으며 길사정과 물 사정이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30년 전으로 되돌아간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그러나 중국이 우리보다 30년 뒤졌다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었지요,
소비재 쪽은 발달이 안 되었지만 군사 과학 쪽은 우리보다 20년 정도 앞서있었습니다.
무한한 자원과 인구 때문에 앞으로는 세계를 지배할 것이라는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나라였습니다.
GNP는 낮지만 대륙이요, 세계의 중심이라고 하는 긍지가 대단했습니다.
여러분들에게 간단히 중국 가톨릭교회에 대해서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중국가톨릭 교회는 애국교회와 지하 교회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애국교회는 공산혁명 후에 교황청과의 관계를 끊은 교회입니다.
다른 말로 구국교회라고 합니다.
내용적으로는 교황청과 관계가 회복이 되었고 미사 때 교황님의 이름을 부릅니다.
그것이 눈에 보이는 가톨릭교회입니다.
지하교회는 혁명 후에 교황과의 일치를 주장하며
끝까지 박해를 받고 있고 지하로 숨어 있는 교회입니다.
지하교회 사제를 중국에서 딱 한 분을 만나 보았는데 연세가 84세였습니다.
그 당시 심양 주교좌 성당에서 피정을 시켰을 때 그 주교님의 보호를 받고 계셨지요.
공식적으로 보호받을 수 있는 곳은 심양주교좌 성당 한 곳 뿐이었습니다.
저는 그곳 주교좌성당에 머물면서 정말 감동적인 모습을 보았습니다.
주일날 성당 문 안으로 많은 중국교회 신자들이 들어와서
애국교회 신자는 눈에 보이는 대성당 안으로 들어갔고
지하교회 신자는 담을 돌아서 지하에 있는 84살 된 신부님이 계시는 곳으로
몰래 미사 드리러 가는 광경을 보았습니다.
지하교회나 애국교회나 사제나 신자나 할 것 없이 참으로 열심하고
겸손하다는 강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지하성당은 비좁아서 100여명 밖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습니다.
나머지 400명은 마이크 소리도 들리지 않는 그곳에서 앞 사람이
무릎을 꿇으면 같이 꿇고, 앞 사람이 일어나면 같이 일어났습니다.
특별히 가슴이 뭉클했던 것은 그날 비가 많이 내리는 날이었는데
교구청 마당은 비가 와서 질퍽질퍽했는데도 성혈 축성을 알리는 소리가
저 지하 골방에서 ‘뗑그랑~ 뗑그랑~’ 울리니까
밖에 있는 지하교회 신자들은 우산을 다 내려놓고
그 진흙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를 다 맞아가면서
성체성혈 축성을 받기 위해서 한 마음으로 거행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뒤에 있는 건물에서 유리창 밖으로 그 모습을 보면서 혼자 눈물을 흘렸습니다.
‘신앙은 어려울 때 성장이 되는 것이구나!’
거양성체 때 진창에 그대로 무릎을 꿇는 모습은 마치 미션 영화에
나오는 그 장면 그대로였고, 감동적이었습니다.
종교에 대한 중국교회의 분위기는 여전히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고
공산주의를 파괴한다고 하는 것이 기존 사상입니다.
심양공항에 도착해서 성물과 강론테입, 성경책을 빼앗기는 험악한
분위기를 보며 중국선교를 너무 쉽게 생각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외국자본 유치를 위해서 개방정책을 쓰고 있지만 아직도 엄격히 통제되고 있었고
특별히 외국신부와 수녀들에 대해서는 감시가 철저했습니다.
입국 목적도 선교가 아니라 관광이나 교사로서의 신분이었습니다.
그러면 신부님은 어떻게 그 살벌한 속에서 피정을 시킬 수 있었습니까?
중국은 도시의 단위가 성,현, 진이라고 하는 지역단위마다 종교국이 있어서
검열과 통제를 하는데 그 지역 천주교 회장님과 종교국장과의 유대관계에 따라서
융통성이 상당히 있었습니다.
한 번은 강제추방의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습니다.
조선족 피정시킬 때의 어려운 점은 표준어와 다른 것이 많았습니다.
조선족은 남편을 '나그네' 라고 했고, 신부생활을 ‘신부질’ 한다고 합니다.
회장님이 날 보더니 “신부님은 신부질을 몇 년이나 했소?”
아주 쌍스럽게 들렸지만 거기서는 자연스럽게 쓰고 있었습니다.
저는 조선족보다는 한족, 중국 사람들을 피정시켰습니다.
왜냐?
한국천주교회는 중국에서 들어왔고 주문모 신부님이 오셔서 순교하셨기
때문에 영적으로 큰 빚을 지고 있습니다.
중국에서 신자들이 가장 많은 소팔가자 성당,
김대건 신부님, 최양업신부님, 페리올 신부님과도 연관이 있는
주민 수 2500명 가운데 2400명이 교우인 중국 최대의 교우촌에서
‘김대건신부 현양 추모회’ 라고 하는 현수막을 걸고
한국사제로서는 처음으로 역사적으로 피정지도를 했습니다.
그 동네에는 놀랍게도 아이들의 이름이 ‘대건이’ 가 그렇게 많았습니다.
옛날에 그곳에 있었던 조선에서 온 신학생이 사제가 되어서
성인품에까지 올랐다고 하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었습니다.
그곳에서 3일 피정 시키고 난 뒤에, 혼자서 6년 뒤에 다시 갔더니
‘웅열이’ 라는 이름이 또 그렇게 많았습니다.
제가 다녀 간 뒤로 ‘웅열이’ 라고 이름을 지었던 겁니다.
50년간의 박해 속에서도 신앙을 지켜온 모습이 놀라웠고
공의회 이전의 모습이 여전히 많이 남아 있었습니다.
성당 들어가고 나갈 때 반장궤를 꼭 합니다.
미사 한 시간 전부터 성모님에 대한 기도를 시작합니다.
미사 끝나고 나서도 반드시 한 시간 동안 모든 신자들이 같이 기도합니다.
끝도 안 보이는 옥수수밭 한 가운데 그 마을이 있는데
회장님이 신부님 왔다고 종을 치니까 그 끝도 안 보이는 옥수수 밭에서
사람들이 개미처럼 꼼지락거리면서 성당 안으로 몰려들기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성당 마당이 가득 찼습니다.
저녁만가를 여러 집들이 같이 모여서 지금도 하고 있고
사제를 떠나보낼 때에는 땅에 무릎을 꿇고 사제에게 강복을 받습니다,
가난하고 어렵게 살지만 하느님의 계명을 우선으로 삼고 살아갑니다.
중국종교법은 18세미만은 성당에 못 가고, 대학에 들어가면 종교를
못 갖지만 소팔가자는 공산당 서기부터 진, 장까지 다 교인이기 때문에
중국의 공산당 법과는 상관없는 치외법권의 신앙마을이었습니다.
김신부님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는 라틴어 수도원을 창립했고,
3명의 수도자를 양성했다는 이야기를 그때 처음 알았습니다.
하 알렉산더, 배 야고버, 정안드레아
세 분 모두 중국사제가 되었습니다.
김대건신부님은 그곳에서 신학교를 만들었던 겁니다.
그 후손들도 만나보았습니다.
김대건 사제는 자신이 가르친 제자들이 사제가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이런 이야기는 한국교회에서는 아직 언급이 되어있지 않은 이야기입니다.
개신교의 선교에 비해서 가톨릭의 선교는 아직 미약합니다.
평신도가 한국교회를 시작한 것 같이 중국선교도 평신도에 의해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느님의 섭리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이 직접 북방선교에 못 나가니까 도와주세요.
여러분을 대신해서 여러분들의 내는 후원 회비를 가지고
북방선교회 회장님들은 중국신학교, 조선족들 탈북자를 도와주고 계세요.
중국이 천주교를 박해하는 정치적인 이유가 있느냐?
로마 바티칸에서는 아직도 대만을 중국으로 인정해요.
로마 바티칸은 신앙국가이기 때문에 대만을 버릴 수가 없어요.
중국은 아직까지 수교가 안 되어 있기 때문에 역학적인 문제가 있는 것이지요.
북방선교회 회장님들을 보면서 혼자도 가서 많이 둘러보았어요.
지금은 90년 대 초와는 많이 달라졌지만 원칙과 근간은 똑같다는 겁니다.
천주교가 중국을 통해서 들어왔고
우리나라의 첫 번째, 두 번째 사제가 중국 땅에서 공부해서 서품을 받았으니
이제는 반대로 우리 한국교회가 중국교회를 도와야 할 때입니다.
중국신학교를 도와야 되고, 중국 신학생을 도와야 합니다..
오늘 성모님께서 여러분을 부른 이유는 치유와 구마와
전대사의 은혜도 주시겠지만 성모님이 특별히 부탁하는 것은
사제가 되려고 애쓰고 있는 중국신학생을 도와주라고 하는 것도
의무라고 생각하고 정성을 다해서 후원회원에 가입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북방선교회 회장님들을 위해서 박수 한 번 부탁드립니다.
건강이 허락이 된다면 은퇴 후, 중국선교도 한 번 더 가보고 싶은 열망도 있습니다.
오늘 북방선교를 허락하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립니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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