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보라, 하늘이자 별이신 주님을!” - 1.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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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1-15 | 조회수323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12.1.15 연중 제2주일
사무 상3,3ㄴ-10.19 1코린6,13ㄷ-15ㄱ,17-20 요한1,35-42
이런 현상은 도시생활, 특히 아파트 단지의 생활을 통해서 자라나는 데 그 까닭이 있을지 몰라. 바라보는 대상이 거리 양쪽의 건물이고 창밖의 아파트 건물이니 그 시야가 차단되고 말지. 그러므로 가시공간의 크기가 없어지므로 시력이 퇴화되기에 알맞지. …오늘에 돌이켜 본다면 내 어린 시절은 거의 무제한의 시야에 내던져진 인간의 공간이 보장되어 있었어.”
지금도 동물적 환경을 지키고 사는 유목민의 시력은 대략3.0에서 5.0에 이릅니다. 저는 그 놀라운 시력에서 얼마나 멀리 보고 싶었을까. 얼마나 멀리 닿고 싶었을까. 얼마나 멀리 부르고 싶었을까 하는 그리움의 크기를 느껴요.”
두루두루 바라보라 있는 눈입니다. 눈 따라 가는 마음입니다. 눈 들어 먼 산을, 하늘을, 별을, 숲을, 나무를, 들판을 바라볼 때 마음도, 정서도 순화되고 깊어집니다. 마음에 여유와 평화를 찾습니다.
하늘, 산, 배나무들, 길게 난 길들 등 바라 볼 것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듯 하늘을, 산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주님을 바라보듯 별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늘이신 주님의 성체를 밥으로 먹고 사는 우리들입니다.
하늘을 바라볼 뿐 아니라 하늘을 먹어야 살기에 이 거룩한 미사를 통해 하늘이신 주님의 성체를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그 노 시인은 참으로 배가 고팠던 어린 시절 밤늦게 어머니를 기다리던 중, “저 것 따줘. 저 것 따줘” 하고 울며 보챘다 합니다.
하늘의 주먹만 한 별들이 밥으로 보였던 것이지요. 마치 하늘에 별밥이 뿌려져 있었던 듯 착각한 꼬마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밥이야 말로 별처럼 내 영혼을 드높여 주는 신성한 물질임을 깨닫습니다. 바로 별과 밥, 꿈과 물질, 지상의 현실과 우주는 결코 동 떨어지지 못한다는 일여(一如)의 세계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그의 두 제자도 참으로 주님을 찾았던 분입니다. 간절히 찾을 때 나타나는 주님입니다.
이 말을 듣자마자 세례자 요한의 두 제자들은 지체 없이 스승 요한을 떠나 예수님을 따라 갑니다.
요한의 두 제자들의 답이 간명합니다.
주님께 배우고 싶다는 간절한 원의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늘 깨어 주님을 찾았던 사람임이 분명합니다.
세 번 씩이나 한결같은 그 응답은 얼마나 기분 좋은지요.
하느님이 ‘아담아, 너 어디 있느냐?’ 물었을 때 나무 뒤에 숨은 아담과는 얼마나 극명한 대조인지요.
사무엘처럼 부르심에 즉시 ‘저를 부르셨습니까? 저 여기 있습니다.’ 응답하는 이들입니다.
지체 없이 당신 집에 초대합니다.
그날 그분과 함께 묵습니다.
보고 배울 권위가, 어른이, 부모가, 선생님이 없기 때문입니다.
진정 지혜로운 부모들, 선생님들은 아이들을 주님께로 인도하여 주님 안에 머무르며 배우도록 인도합니다.
정작 필요한 것은 주님 안에 머물러 주님으로부터 온유와 겸손을 배우며 그 사랑 안에 머무르는 관상입니다.
지친 영육을 주님의 생명과 사랑으로 충전시키는 시간입니다. 눈 활짝 열고 사랑의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입니다.
어느 노모의 그 딸을 향한 따뜻한 눈길을 잊지 못합니다.
정말 그윽하고 따뜻한 딸을 향한 노모의 눈길이었습니다.
눈 활짝 열어 주님을 바라보는 시간임과 동시에 귀 활짝 열어 사무엘처럼 주님의 말씀을 경청하는 시간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듣는 것입니다.
몸도 마음도 정화되고 치유됩니다.
몸의 신비를 깊이 깨닫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말씀이 참 적절합니다.
“여러분의 몸이 여러분 안에 계시는 성령의 성전임을 모릅니까?”
“하느님께서 값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의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하십시오.”
주님의 거룩한 성체를 받아 모시는 믿는 이들의 몸입니다.
우리 몸도 우리의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몸으로 하느님을 영광스럽게 해야 합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면서 이런 우리 몸 관리에 대한 자각도 깊어집니다.
관상과 활동은 영성생활의 리듬입니다. 복음 선포는 교회의 본질적 사명입니다.
먼저 자기 형 시몬을 만납니다.
주님을 만난 기쁜 소식을 전해야 합니다.
주님을 찾아 많은 이들이 수도원에 오는 것은 입소문 때문입니다.
바로 주님과의 만남이 구원임을 깨닫습니다.
길이자 생명이자 진리이신 주님께 인도하는 것입니다.
요한은 두 제자를 주님께 인도했고, 안드레아는 형 시몬을 주님께 인도했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삶 전체가 주님을 향한 이정표가 될 때 복음 선포는 저절로 완성될 것입니다.
어느 충실한 형제에 대한 형제들의 이구동성의 ‘그 형제는 입댈 것이 없다.’ 라는 말이 참 맛좋은 여운으로 남아있습니다.
그것에 버금가는 것으로 눈감는다는 표현이 있는데 그것은 인간의 드넓은 시야로부터 떠난다는 뜻도 될 것이네.”
하느님을 숨 쉬듯 숨을 쉬고, 하느님을 보듯 눈 활짝 열고 세상 만물을 봐야 넓어지고 깊어지는 우리의 시야입니다.
주님 안에 머무르십시오. 주님을 전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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