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할 일이 없어지면, 남는 것은 죄를 짓는 일 뿐입니다.
우리는 삼손을 기억합니다. 삼손은 누구도 당해낼 수 없는 힘을 지녔습니다. 그가 불레셋으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시켜야 하는 소명이 있었음에도 게으름을 피웁니다. 사람이 게을러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의 욕망을 채우려 합니다. 그래서 적국의 여자 데릴라를 좋아하게 되고 결국 그것 때문에 모든 힘을 잃고 두 눈까지 뽑히게 됩니다.
오늘 독서에서도 왕이 되고 나라가 안정되자 하느님을 충실히 섬기던 다윗도 죄에 떨어지게 됩니다. 할 일이 없자 여자를 탐하게 되고 결국 그녀의 남편까지 죽이게 됩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 죄를 지을 때는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요? 일을 하고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게으름을 피우고 있었습니다. 게으름을 피우다보니 여자는 빛깔 좋은 뱀과 사귀게 되고, 남자는 여자만 바라보다가 함께 죄에 빠지고 맙니다.
사람의 몸은 게을러지면 자연적으로 죄를 찾게 되어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40-50대를 가장 선호한다고 합니다. 돈을 가장 많이 벌 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은퇴를 하고나면 가지고 있는 재산 자녀들을 위해 다 쓰고 불쌍한 신세가 됩니다. 아마 그래서 일을 하고 돈을 버는 시기를 가장 좋아하는지도 모릅니다.
유럽 사람들은 은퇴 이후를 가장 좋아합니다. 일보다는 풍부한 연금을 받으며 말년을 여유 있게 지내고 싶기 때문입니다. 만약 우리나라도 연금이 잘 나오고 복지가 좋아진다면 일하는 것보다는 여유 있게 쉴 수 있는 은퇴 후를 더 좋아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 삶의 목표가 나이 들어 편안하게 놀고먹는 것이 되어도 되는 것일까요?
사제들도 이제 은퇴가 많아지면 교구가 다 책임질 수 없기 때문에 개별적으로 연금이나 보험을 들라고 권고하기도 합니다. 은퇴 후를 위해 돈을 모으기도 합니다.
저는 아직 어려서 그런지 일도 하지 않을 것이면서, 왜 오래 살려고 하는지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로마의 철학자이며 정치가인 세네카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습니다.
“모두들 시간이 짧다고 불평하지만 우리는 쓸 줄 아는 시간보다 더 많은 시간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뚜렷한 목적도 없이, 우리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도 못한 채 인생을 보낸다. 우리는 생명의 짧음을 불평하면서도 실제로는 생명이 끝없는 것처럼 행동 하고 있다.”
즉 시간이 있어도 활용할 줄을 모르는데, 그 이유는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제 주위 은퇴 신부님 중에는 수녀원에서 미사를 해 주시며 포콜라레의 일을 맡아 보시는 분이 있고, 또 은퇴 하셨음에도 해외에 나가 선교를 하시는 분도 계십니다. 하느님나라 건설이 우리의 목표라면 어떻게 은퇴가 있고 쉴 시간이 있겠습니까?
저에게 어떤 자매가 화분을 선물하면서 자신의 마음이니 절대 죽이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저는 그러겠다고 하고 잘 키워보려고 했는데 결국 물 주는 것을 며칠 잊어버렸고 식물은 이내 죽어버렸습니다.
화분의 꽃이 자라기 위해서는 적당한 빛과 온도, 흙과 물 등이 있어야합니다. 나머지는 처음에만 잘 해 놓으면 되지만 물을 주는 것은 꾸준함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를 이런 식물이 커가는 것과 비유하십니다. 하느님나라는 땅에 뿌려진 씨가 어느새 싹이 트고 자라고 잎과 줄기가 생겨 열매를 맺게 되는 것처럼 우리 안에서 우리도 모르게 자라납니다. 그러나 모든 사람 안에서 자라나는 것이 아니라 그 씨에 끊임없이 물을 주는 사람 안에서만 자라나게 됩니다.
우리가 만약 하느님나라 씨에 물을 주지 않는다면 다른 무엇에게 주고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나라 아닌 다른 모든 것들은 죄입니다. 즉 하느님나라에 주지 않으면 죄에 주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게으름입니다. 물을 주어야 하는 농부는 게으를 틈이 없습니다.
게을러질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은 물질적으로도 이미 많은 은총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럴 때일수록 남는 시간을 더 잘 활용해서 내 마음과 이웃들 속에 자라나는 하느님나라를 위해 마지막 숨이 다할 때까지 일해야 할 것입니다.
벤자민 프랭클린은 이렇게 말합니다.
“일하는 농부가 앉아있는 신사보다 존귀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