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오늘 제가 서 있는 이 자리에서 주님의 목소리를 듣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 Lectio )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 성령이 내려오시고, 하느님의 아들이란 당신의 정체성을 확인받으신 전前 문맥 ( 마르 1,911 )에 이어 오늘 말씀은 ‘광야의 유혹과 복음 선포’ 라는 두 가지 주제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본디 사명은 갈등과 유혹 그리고 논쟁을 불러옵니다.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께서는 성령에 의해 광야로 내보내 지십니다.( 12절 ) 광야라는 그 이름만으로도 삭막함과 두려움, 삶의 조건이 결핍된 장소로 떠오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민족은 광야를 사탄과 적대세력이 주둔하는, 곧 인간의 생명을 위협하는 원초적인 혼돈의 장소로 인식해 왔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광야에서 40일 동안 사탄에게 유혹을 받으십니다.” ( 13ㄱ절 ) 40일은 이스라엘 민족의 광야생활 40년 ( 민수 32,13; 신명 8,2 )과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지낸 40일 ( 탈출 34,28 ) 그리고 엘리야가 호렙산을 향해 걸었던 40일 ( 1열왕 19,1 – 8 )을 연상하게 합니다. 이런 상황들은 40이란 상징적인 숫자와 함께 하느님의 부재중에 초래되는 위기를 암시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충실성은 시험과 고통 속에서 실현됩니다.( 히브 5,8 참조 ) 마태오복음에서 예수님은 40일이 지난 후에 유혹을 받지만 ( 마태 4,2 ) 마르코복음에서는 광야 40일이 유혹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스어로 ‘유혹과 시련’ 은 한 단어입니다. 마태오와 루카는 세 가지 유혹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면 마르코는 40일에 걸쳐 행해진 ‘시련’ 을 강조합니다. 비록 광야가 시련의 장소일지라도 “들짐승과 함께 … 천사들이 그분의 시중을 들었다.” ( 마르 1,13ㄴ절 )는 것은 메시아의 통치 아래 이루어질 조화로운 세상과, 예수님은 하느님의 도움으로 시련을 이겨낸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시편 91,11 – 13; 이사 11,6 – 8; 65,25 참조 ) 하지만 마태오복음과 루카복음에서 악마는 예수님을 유혹하는데 실패한 후 떠나가지만 ( 마태 4,11; 루카 4,13 ) 마르코복음에서 사탄은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 뿐 아니라 예수님의 공생활 전반에 걸쳐 계속 유혹합니다.( 마르 8,11; 10,2; 12,15 참조 ) 이처럼 광야는 어느 일정 기간만이 아니라 예수님이 생애에 겪었던 모든 갈등과 유혹을 함축하여 보여주는 장소인 만큼, 우리가 서야 할 자리이며 우리의 소명을 이루어가야 할 자리일 것입니다.
갈릴래아 선교의 시작을 알리는 마르코복음 1장 14 – 15절은 전반부에 이어지는 전도여행의 지리적 여정을 준비하는 한편, 예수님의 복음 선포 전체를 간략하게 요약하고 있습니다. 초대교회와 사도 바오로가 처음 사용했던 용어 ‘복음’ 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에 관한 내용으로 하느님께서 인간의 구원을 위해 깊이 개입하셨기에 ‘하느님의 복음’ 이라 했습니다.( 1테살 2,2.8 – 9; 2코린 11,7; 로마 1,1 ) 마르코는 이 용어를 빌려와 예수님께서 전하는 하느님 나라에 관한 기쁜 소식을 ‘하느님의 복음’ 이라고 합니다.( 이사 52,7; 61,1 )
하느님의 복음은 “때가 차서 하느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 는 선포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는 요청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르 1,15 ) ‘때가 찼다.’ 는 것은 이스라엘이 그토록 오랫동안 기다려 온 구원의 새롭고 결정적인 시대가 예수님의 출현과 더불어 동터왔다는 것입니다.( 2,21 – 22 참조 )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요한이 잡힌 뒤에” 시작한 갈릴래아 선교는 연대기적인 의미보다 예수님과 요한의 활약을 구분 짓는 신학적 의미로서 예수님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을 나타냅니다.( 14ㄱ절 )
하느님 나라 자체이신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 1,1 )께서 그분의 뜻에 따라 하느님 나라를 열어 가실 것입니다. 이 하느님 나라에 합당한 사람의 자세가 ‘회개’ 와 ‘믿음’ 입니다. 회개가 자기중심에서 하느님중심으로 돌아서는 삶의 전환이라면, 믿음은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다.’ 는 기쁜 소식을 수락하는 것입니다.
이미 하느님의 나라가 시작되었다 해도 세상의 것만 추구하는 사람한테 하느님 나라는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을 비우고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을 받아들이는 사람은 하느님 나라의 시민이 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의 후 後 문맥으로 소명사화가 이어지는데 ( 1,16 – 20) , 이는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 15ㄷ절 ) 라는 말씀대로 사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말씀은 우리를 소리쳐 깨우지만, 일어서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얼마나 되겠는지요 ?
묵상 ( Meditatio )
광야와 회개 그리고 복음이란 단어가 마음을 꽉 메워옵니다. 풍요가 넘쳐 부족함과 고요함을 찾을 수 없는 우리네 삶의 자리, 어느 자락이 그리스도께서 머무시는 광야일까요 ? ‘주 ! 찬미’ 를 외치면서도 이웃의 빈곤을 외면하고, 고통과 시련이 두려워 진실을 피해 가며, 세상의 가치에 순명하는 그 자리가 오늘날 우리의 죄는 아닐는지요 ? 그 무엇에 앞서 예수 그리스도를 우선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것이 회개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그렇게 할 때 비로소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라고 외치는 예수님의 목소리가 우리네 가슴에 반향되지 않을까요 ?
기도 ( Oratio )
나 주님께 바라네. 내 영혼이 주님께 바라며 그분 말씀에 희망을 두네.( 시편 130,5 )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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