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자비하신 아버지 - 3.1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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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3-10 | 조회수352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12.3.10 사순 제2주간 토요일 미카7,14-15.18-20 루카15,1-3.11ㄴ-32
‘당신의 자비는 영원하시다.’였고, 미사 중 화답송 후렴은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네!’였습니다.
“너희 아버지께서 완전하신 것처럼 너희도 완전한 사람이 되어라.”
“너희 아버지께서 자비하신 것처럼 너희도 자비로운 사람이 되어라.”
오늘 복음 역시 주인공은 자비하신 아버지입니다.
예사롭지 않았습니다. 한 신문(경향)은 ‘한반도와 세계 평화’를 위한 제44차 조찬기도회에서 참석자들과 함께 힘차게 찬송가를 부르는 정장 차림의 이명박 장로 대통령의 사진이었고, 한 신문(한겨레)은 제주도 강정마을에서 해군기지건설현장에서 윗옷을 벗고 시위하다 울음을 터트리는 백발 머리 흰 수염의 문 정현 노신부의 사진이었습니다.
누구의 기도를 들어줘야 하나, 하느님의 심정도 참 난감할거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명박 대통령의 아버지이자 문정현 신부의 아버지입니다. 복음의 큰 아들의 아버지이자 작은 아들의 아버지입니다. 율법학자들, 바리사이들의 아버지이자 세리, 죄인들의 아버지입니다. 우파의 아버지이자 좌파의 아버지요, 보수의 아버지이자 진보의 아버지입니다. 부자의 아버지이자 빈자의 아버지요 선인의 아버지이자 악인의 아버지, 의인의 아버지이자 죄인의 아버지입니다.
환상의 골을 실재의 골로 착각하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마치 어떤 부자와 라자로의 건널 수 없는 큰 구렁을 연상케 합니다.
목회자들의 어려움이 참으로 크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로서 함께 살 수 있을까요?
서로 간 싸우기로 하면 끝이 없습니다. 끊임없는 자아성찰의 회개를 통해 자비하신 아버지를 닮아 자비로운 사람이 되는 길, 하나뿐입니다.
둘 다 자비하신 아버지의 아들답게 사는 데 실패했습니다.
자식 이기는 아버지 없다고 이런 아버지를 통해 하느님의 외로움을 묵상합니다.
저는 아버지의 아들이라고 불릴 자격이 없습니다. 저를 아버지의 품팔이꾼 가운데 하나로 삼아주십시오.”
이런 면에서 우리 모두는 작은 아들입니다.
아버지 곁에서 평생 살았다는 큰 아들 역시 아들 자격 없긴 마찬가지입니다. 아버지의 종처럼 살았던 인정머리 없는 큰 아들이었음은 아우의 귀환 시 확연히 들어납니다.
진정 아버지의 효자 아들이었다면 아버지의 기쁨에 흔쾌히 동참했을 것입니다만
실제 이런 형들은 많지 않을 것입니다.
큰 아들 같은 우리 수도승들에겐 큰 경종이 됩니다.
고답적인 태도를 취한 큰 아들 같은 수도자는 아닌지 자주 성찰해야 할 것입니다.
환영 잔치에 참여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체험한 자비하신 하느님임이 분명합니다. 미카 예언자가 역시 이런 자비하신 하느님 체험을 고백합니다.
오히려 기꺼이 자애를 베푸시는 분이시다. 그분께서는 다시 우리를 가엾이 여기시고, 우리의 허물을 모르는 체해 주시리라.”
먼 옛날 당신께서 저희 조상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우리를 성실히 대하시고 자애를 베풀어주십시오.”
회개할 때 자비로운 아버지체험입니다.
깨달음의 깊은 눈으로 보면 서로 간의 불화의 큰 골도 환상일 것입니다.
서로 아버지의 아들임을 깨달아 알 때 저절로 사라지는 크고 깊은 큰 골이라는 것입니다.
호소하고 설득하시는 분이시며, 추궁하고 따지고 캐는 분이 아니라 봐도 못 본체, 알아도 모르는 체, 들어도 못 들은 체 덮어 주시며, 끝까지 기다리며 지켜보는 분이십니다.
과거는 불문에 붙이시고 지금 여기 회개하여 돌아 온 자녀들에 기뻐하시는 분이십니다.
당신 아드님의 미사 잔치에 우리 모두를 초대해 주시어 당신 자비를 닮은 당신의 자녀가 되게 하시고 우리 사이의 큰 골을 없애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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