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소통과 불통 - 3.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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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3-15 | 조회수683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2012.3.15 사순 제3주간 목요일 예레7,23-28 루카11,14-23
관련된 기사 일부입니다.
‘아무리 황당무계한 권력이라도 세상이 응시하는 광장에서는 활개를 펴지 못한다. 진실과 정의를 지키는 데는 시민의 각성과 노고가 필요하다. 그래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한다.’
오늘 예레미야 1독서의 후반부 예레미야의 탄식과도 같은 말씀 역시 오늘의 인간 현실을 지칭하는 듯합니다.
말 그대로 불통으로 죽은 인간이요 사회입니다.
오늘은 '소통과 불통'에 대한 묵상을 나눕니다.
가장 중요하면서고 가장 힘든 게 소통입니다.
불통으로 괴로워하는 부부들을 보면 참 불가사의하게 생각됩니다. 도대체 부부생활이든, 수도생활이든 답이 없습니다. 소통에는 왕도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소통해야 삽니다. 소통은 생명이자 자유이자 평화입니다. 소통은 상대방에 대한 이해, 존중, 신뢰, 공감, 연민, 배려를 의미합니다.
소통의 대가인 예레미야, 예수님이 그 좋은 본보기입니다.
신체의 원리나 공동체의 원리나 똑같습니다. 불통으로 막혀 신체의 병이요 공동체의 불화입니다. 소통이 이상이라면 불통은 현실입니다.
그대로 우리 불통의 인간을 상징합니다.
제멋대로 사악한 마음을 따라 고집스럽게 걸었다. 그들은 앞이 아니라 뒤를 향하였다. …그들은 나에게 순종하거나 귀를 기울이지 않고 오히려 목을 뻣뻣이 세우고 자기네 조상들보다 더 고약하게 굴었다.”
바로 이런 완고한 고집불통의 사람입니다.
완고한 불통의 사람들을 봅니다.
바로 불통의 사람을 소통의 사람으로 치유했다는 심오한 의미를 함축합니다.
마귀 우두머리 베엘제불의 힘을 빌려 마귀를 쫓아냈다는 둥
죄인이라 하고 마귀 들린 이라 합니다. 이런 면에서 모두가 정도의 차이일 뿐 죄인이요, 마귀 들린 사람들입니다.
앞으로 이웃이 없는 고립단절의 아파트 생활이 정착될수록 사람은 더욱 자기 안에 갇(닫)힌 불통의 수인(囚人)이 될 것이니 상황이 밝지 않습니다.
이런 면에서 박 원순 서울 시장의 소통과 협동의 마을 공동체 복원 사업이 참신하게 생각됩니다.
소통의 중심으로서 교회의 역할을 더욱 증대될 것입니다.
불통의 수인을 구원해 주실 분은 주님뿐이 없습니다.
주님만이 '불통의 나'를 열어 소통의 사람으로 구원해 주실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주님은 하느님과의 수직적 소통과 이웃과의 수평적 소통을 상징합니다.
‘장상은 공동체를 교통 정리하는 자이다.’라는 말씀이 생각납니다.
마치 사거리에 위치한 교통순경을 연상케 합니다.
분별의 지혜로 내 마음 중심에서, 공동체의 중심에서 위로 아래로, 좌우사방으로 소통을 원활케 교통정리 하시는 주님이라는 것입니다.
하느님과의 소통, 너와 나의 소통에 이런 공동전례기도보다 더 좋은 것은 없습니다.
하느님과의 소통, 너와 나의 소통을 촉진시켜 주시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매일 미사은총으로 불통의 마귀를 쫓아내시고 우리 마음을 위의 하느님과 좌우사방의 이웃에 활짝 열어 주시어 건강한 소통의 삶을 살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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