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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나는 누구인가?” - 3.23.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작성자김명준 쪽지 캡슐 작성일2012-03-23 조회수464 추천수7 반대(0) 신고

2012.3.23 사순 제4주간 금요일 지혜2,1ㄱ.12-22 요한7,1-2.10.25-30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인가?’ 매일 묻는 자가 수도자라 했습니다.

가장
어렵고도 중요한 물음입니다.

내가 누구인지 몰라 허무와 무의미의 어둠 속에 방황입니다.

 

누구나에게 알고 싶은 공부의 본능적 욕구입니다.


공부의 궁극의 목적 역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입니다.

하여 가장 힘든 게 남 판단하는 것이요,

가장 힘든 게 자기를 아는 것이란 말도 있습니다.

 

바로 내가 누구인지 아는 것이 구원이요 겸손이요 지혜임을 깨닫습니다.

 



세상에는 세 부류의 인생이 있습니다.

첫째는 자기가 누구인지 알아 지족(知足)의 행복을 사는 인생,

둘째 끝내 자기가 누구인지 찾지만 찾지 못한 인생,

셋째 아예 내가 누구인지 묻지도 않고(모르고) 되는대로 사는 인생입니다.

 


과연 나는 누구입니까?

언젠가 읽은 예화가 생각납니다.

내공이 깊은 수녀님과의 문답입니다.

“너는 어디로부터 왔느냐(Where are you from)?”고향을 묻는 물음에

“나는 어느 곳으로부터도 오지 않았다(I am from nowhere).”는

수녀님의 화두와 같은 대답입니다.

 


하느님은 곳의 장소가 아닙니다.

바로 ‘노훼어(nowhere)’는 하느님으로부터 왔다는 뜻이요

하느님이 바로 고향이라는 의미입니다.

 


어느 고승의 임종 시 예화도 생각납니다.

“어디로 가십니까?” 제자의 물음에

“온 곳도 없는데 갈 곳이 어디 있겠느냐?”

역시 고승의 화두와 같은 말씀입니다.

우리식으로 말해 ‘하느님으로부터 와서 하느님께 간다.’로

풀이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곳의 장소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물음이라면 하느님은 답입니다.

하느님 없이는 아무리 내가 누구인지 물어도 답이 안 나옵니다.

하여 답답하여 끊임없이 하느님을 찾아 수도원에 오는 사람들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게 위해서입니다.

 

하느님을 찾는다 함은 바로 나를 찾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없으면 무(無)로부터 나와서 무(無)로 간다는 답뿐이 없습니다.


이래서 하느님을 놓치면 허무주의 어둠의 심연에 빠짐은 필연입니다.

 

우리는 결코 무에서 와서 무로 가는 우연적 존재가 아니라는 말입니다.

‘나는 누구인가?’

바로 주님의 기도 서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안에 답이 있습니다.


아버지의 자녀들인 우리들입니다.

이게 우리의 신원이자 정체성입니다.

하느님 아버지는 우리의 기원이자 목적입니다.

이에 대한 다음 에페소 찬가 한 구절이 생각납니다.

 


“하느님은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천지창조 이전에 이미 뽑으셨고,

  사랑으로 당신 앞에 거룩하고 흠 없는 자 되게 하셨도다.”

 



여렸을 적 어머니와의 예화도 생각납니다.

어머니를 고생시키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워

아버지를 원망했을 때의 어머니의 반응입니다.

‘너 그러면 안 된다. 아버지 없이 네가 어디서 나왔느냐?’

 
할 말이 없었고 아버지 편을 드는 어머니가 서운했던 기억입니다.

 

참 의미심장합니다.

그대로 아버지를 하느님 아버지로 연결시켜도 그대로 통하니 말입니다.


어머니는 언제나 아버지를 두둔하셨고 원망 하나 하지 않으셨고

모두를 팔자소관으로 돌렸습니다.


우리 믿는 이들 식으로 하면

하느님의 뜻으로 알고 묵묵히 받아들이며 산 지혜로운 분이셨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의 아버지입니다.

이걸 눈이 열려 깨달아 알면 구원입니다.

나를 알고 너를 알게 됩니다.

 


오늘 1독서와 복음은 악인과 의인의 대조에서 일치됩니다.


악인의 포위되어 있는 의인의 모습입니다.

1독서에서 의인은 악인에,

복음에서 의인은 예수님은

그를 죽이려는 악인을 상징하는 유대 지도자들에 포위되어 있습니다.

 


누가 악인이고 누가 의인입니까?

타고난 악인도 의인도 없습니다.

우리 안에 잠재해 잔인성, 폭력성, 공격성 등

어둠의 악으로 기우는 경향 역시 악인의 가능성을 말해 줍니다.



말과 생각의 유형무형의 폭력으로 무형의 상처와 살인도 많았을 것입니다.

 

눈이 멀면 어둠이요 눈 뜨면 빛입니다.

눈이 멀면 지옥이요 눈 뜨면 천국입니다.

눈이 멀면 악인이요 눈 뜨면 의인입니다.


악에, 탐욕에, 돈에 눈멀면 누구나 악인이, 악마가 될 수 있습니다.

의인을 궁지에 몰아넣고자 안달하는 악인에 대한 묘사입니다.

 



'그들의 악이 그들의 눈을 멀게 한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신비로운 뜻을 알지 못하며,

  거룩한 삶에 대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고,

  흠 없는 영혼들이 받을 상급을 인정하지도 않는다.’

 



완전히 영적으로 눈 먼 악인들을 상징합니다.

이런 이들로 널려 있는 세상 같습니다.

하여 뱀같이 지혜롭고 비둘기 같이 순결해야 합니다.

하느님 주시는 지혜와 순결로 악의 공격을 무력화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오직 눈 뜬 의인은 예수님 한 분 뿐입니다.

예수님을 죽이려하는 유대 지도자들 무지에 눈 먼 자들입니다.



우리를 눈멀게 하는 탐욕, 분노, 무지의 어리석음입니다.

이런 악인들 속에서 살아남는 길은

오늘 복음의 예수님처럼 파견의식과 신원의식을 확고히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을 알고 자기를 알고 너를 아는 일입니다.

 


“나는 스스로 온 것이 아니다.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신 데 너희는 그분을 알지 못한다.

  나는 그분을 안다.

  나는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후반부의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의 고백으로 삼아도 좋습니다.



하느님 그분을 알 때 나를 알고 형제로서의 너를 알게 됩니다.

우리 역시 그분에게서 왔고 그분께서 우리를 보내신 것입니다.

모두가 하느님이 보내신 하느님의 선물들입니다.



며칠 전 읽은 어느 정주의 삶에 충실한

베네딕도 수도원 아빠스님의 글이 새로운 깨달음이었습니다.

인용합니다.

 

“수년 전 엄청나게 존경했던 한 수도승이 나에게 말했다.

 ‘앞으로 살아 갈 유일한 길은 좀 더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그는 더 많은 기도나 묵상을 권한 것이 아니라

  서로 더 많이 섬길 것을 제안했다.

  그는 내가 다른 이들을 섬기는 중에

  하느님을 체험하는 깊은 느낌을 갖길 원했다.

  밖으로의 사목 활동이 없는 수도생활일지라도

  매일 서로 섬기는 데는 수천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다.

  그것은 단순히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의 슬픈 섬김(a sad service)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우리가 섬기는 각 사람 안에서

  그리스도 그분(Christ Himself)을 섬기는

  기쁨의 일(a service of joy)이다.”

 



주님은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을 알고 나를 알고 형제들을 알게 하신 후

당신 평화의 일꾼으로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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