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원활한 소통을 위한 노력 - 3.24.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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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3-24 | 조회수390 | 추천수4 | 반대(0) 신고 |
2012.3.24 사순 제4주간 토요일 예레11,18-20 요한7,40-53
소통은 능력입니다. 사람마다 소통의 능력은 다양합니다.
요즘 몇 년 동안 가장 많이 회자되고 있는 단어가 ‘소통’일 것입니다. 그만큼 소통이 어렵고 중요함을 반증합니다.
계층 간, 세대간, 지역 간, 노사 간 등,
오늘 독서의 예레미야와 복음의 예수님의 현실이 바로 그러합니다.
보고 듣는 것의 한계로 인해 자기만의 영역에 갇혀 불통의 삶이 되어가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인지도 모릅니다.
우선적으로 불통의 현실을 인정하는 겸손이입니다. 불통의 현실을 받아들일 때 길이 열립니다.
소통의 사람이 반이라면 불통의 사람이 반이라는 이야기입니다. 바로 이게 인간의 현실입니다.
소통은 일방적이 아니라 쌍방적이기 때문입니다. 소통에도 때가 있는 법, 소통의 때까지 진정성이 통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예수님을 이해한 소통 관계의 경비병과 니코데모가 있는가 하면 예수님과 불통 관계의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 있습니다.
균형감각을 지니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남의 불통만 탓할 것이 아니라 내 자신 소통을 위한 부단한 노력입니다.
폭 넓은 독서, 만남의 체험이 중요합니다.
소통이 생명이라면 불통은 죽음입니다. 이웃과의 소통에 앞서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가 참 절실합니다.
불통의 현실에 좌절하지 않고 하느님과 소통의 기도로 숨통을 내지 않습니까?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예수님이나 예레미야가 고립무원의 불통의 현실 안에서도
선입견과 편견의 불통의 벽을 허무는데 지대한 역할을 합니다.
오해에서 기인한 불통이기에 이해와 더불어 해소되겠기 때문입니다.
불통의 벽을 허무는 데는 제일입니다.
예수님을 두둔하는 니코데모입니다.
먼저 본인의 말을 들어 보고 또 그가 하는 일을 알아보고 난 뒤에야, 그 사람을 심판하게 되어있지 않습니까?”
“당신도 갈릴래아 출신이라는 말이오? 성경을 연구해 보시오. 갈릴래아에서는 예언자가 나지 않소.”
주님과의 살아있는 만남이 없기에 자신의 편견과 아집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는 우이독경, 불통의 사람들인 수석사제들과 바리사이들이요 이 또한 우리의 일면입니다.
우리의 편견과 선입견을 치유해주시어 하느님은 물론 이웃과도 원활한 소통을 이루어 주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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