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하느님의 침묵 - 3.30.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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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3-30 | 조회수387 | 추천수5 | 반대(0) 신고 |
2012.3.30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예레20,10-13 요한10,31-42
하루 중 꼭 필요한 말만 한다면 대부분은 풍요로운 침묵일 것입니다.
때로는 말보다 침묵이 좋을 때가 많습니다. 말의 위로보다도 말없는 침묵의 위로가 마음을 적실 때가 있습니다.
때로 말보다 더 깊은 마음을 전하는 침묵이기 때문입니다.
아빠스님의 시작 기도를 대신한 성모송이 참 편안했습니다. 침묵이 된 말의 기도이기 때문입니다. 늘 해도 지루하지 않고 새로운 성모송입니다.
‘자비송’이 또한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지치고 피곤하고 한계에 봉착했을 때 침묵과도 같은 말의 자비송 기도가 마음을 촉촉이 적셨습니다.
이런 짧은 교회의 공식적 기도문들은 침묵을 깨기는커녕 침묵을 깊이 합니다.
자연의 소리 같아 한결같이 풍요롭고 깊은 침묵으로 이끌어 주며 하느님의 침묵에 닿게 합니다.
지금 읽고 있는 ‘나무에게 길을 묻다.’라는 책 제목도 의미심장합니다.
나무에게 길을 물어 길을 찾아가는 구도자 인생을 상징합니다.
가득한 사막의 침묵을, 나무의 침묵을 통해 하느님의 침묵에 닿습니다.
침묵과 고독을 사랑하는 이는 하느님을 사랑합니다.
사람 누구나 이런 갈망이 있습니다.
도회지 생활에 지친 이들이 자주 찾는다 합니다.
‘높고 외롭고 쓸쓸한’ 고독과 침묵을 찾는 원초적 갈망의 표현입니다.
허무의 진공 상태가 아닌 하느님의 현존이요, 하느님의 연민이요, 물끄러미 바라보는 하느님의 눈길입니다.
침묵은 그대로 기도가 되어 하느님의 침묵에 닿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이 그 배경을 이룹니다.
하느님은 요지부동 반응이 없습니다.
침묵의 깊이에서 만나는 하느님입니다. 침묵과 고독 없이는 삶의 깊이도, 하느님과의 만남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며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이어 또 기도하는 예레미야입니다.
당신께 송사를 맡겨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주십시오.”
이어 터져 나오는 하느님 찬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침묵에서 터져 나오는 찬미기도가 어둠을 빛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바꿉니다.
오늘 독서에 이어지는 다음 예레미야(20,14)의 고백입니다.
복을 받지 마라, 어머니가 나를 낳은 날!”
극심한 고통 중에 있는 이들은 이런 처지에 공감하기도 할 것입니다.
마침내 마음의 눈이 열리고 귀가 열려 하느님을 뵙고, 하느님의 말씀을 듣습니다.
하느님의 침묵은 여전히 계속됩니다.
소명의식입니다.
소명의식입니다.
‘나는 아버지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다면,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하느님의 침묵 중에도 끊임없는 기도를 통해 소명의식, 사명의식을 새롭게 해야 사면초가의 어려움 중에도 살아남을 수 있습니다.
‘사실 이런 작업은 오랜 인내와 특별한 소명의식을 필요로 한다. 인내와 소명의식이 없었다면 애당초 이 작업은 생각할 수도 시작할 수도 없었을 것이다.’
끊임없는 ‘기도와 일’이 있어 또렷해지는 소명의식, 사명의식이요, 이런 의식이 받쳐줘야 항구한 인내도 가능합니다.
이런 침묵과 고독은 그대로 사랑의 기도가 되고 이런 침묵과 고독의 깊이에서 만나는 주님이십니다.
우리는 살아계신 주님을 만남으로 생명과 빛으로 충만한 삶을 살 수 있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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