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세상 속 신앙 읽기
송용민 지음
3. 세상 속 교회
성사, 하느님 은총의 표징
근래 가톨릭 신자들이 겪는 정체성 놀란에는 다종교 사회 안
에서 '내가 왜 굳이 가톨릭 신자로 계속 남아야 하는가'에 대한
적지 않은 의문에서 시작된다. 가톨릭교회 밖에서 얼마든지 마
음의 평화를 찾으며, 번거로운 교회법이나 교회의 규정에 얽
매임 없이 자유로운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개신교도 있고, 의
무를 지우지 않는 불교의 수행에 매력을 더 느낄 수도 있기 때
문이다. 더욱이 종교적 신념이 상대화되는 오늘날 내 신앙이
남의 신앙과 별로 다를 것 없다는 위기의식은 별다른 종교적
체험을 하지 못한 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에 대한 무관심과 혼란
에 이르게 하는 어려움으로 다가올 수도 있다.
누군가 내게 "왜 굳이 가톨릭 신자로 남고 싶어하는가?"라고
묻는다면, 나는 지체 없이 가톨릭교회의 '성사(聖事, sacra -
ment)'때문이라고 말하고 싶다. 흔히 가톨릭교회의 '성사' 하
면 '칠성사'를 떠올리기 쉬운데, 실상 '칠성사'란 농담처럼 말
하는 불교 사찰들 중의 하나가 아니라, 전통적으로 '보이지 않
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 전달해 주는 교회의
자기 이해의 일곱 가지 방식'을 일컫는다. '교회의 자기 이해
방식'이라는 어려운 말에 대해 정확히 알 필요가 있다.
'교회'가 인간의 종교적 갈망을 제도적으로 채워 주는 공동
체 가운데 하나라고만 생각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교회는 "인
간을 향한, 인간의 구원을 위해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은총이 역
사 안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한 인격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분명히 드러났음을 깨닫고 고백하는 신앙인들의 공동
체"를 말한다. 여기서 '볼 수 없는 하느님 은총'이란 우리가 흔
히 필요할 때 내게 꼭 맞는 맞춤형 선물꾸러미를 하느님이 주
시는 그런 형태의 은총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인간이
궁극적 완성에 이르는 길이 볼 수 없는 하느님의 손길을 볼 수
있는 형태로 느끼고, 그분의 은총이 구체적으로 내 피부에 와
닿는 현실임을 깨닫는 것을 말한다.
그리스도교는 이러한 하느님 은총이 역사 안에서 구체적인
한 인물 나자렛 예수 안에서, 그분의 십자가 죽음과 부활을 통
해 '볼 수 있는 형태'로 드러났음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종교다.
곧 인류의 죄악과 모순 속에서 실패나 끝처럼 보이는 예수의
죽음을 뛰어 넘는 부활사건을 통해 하느님 은총이 결국에는 승
리할 것이라는 희망에 자신의 실존을 거는 신앙 공동체를 말한
다.
가톨릭교회는 바로 이러한 희망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신'(요한 14,9 참조) 예수님
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면서, 하느님 은총 없이는 단 한순간도
살 수 없다는 것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영(성령)
의 도움으로 깨달았거나 깨닫고 싶어하는 믿는 이들의 공동체
다. 그래서 제2차 바티칸공의회는 예수 그리스도가 볼 수 없는
하느님을 볼 수 있게 해주신 것처럼, 교회를 하느님과 이루
는 깊은 결합과 온 인류가 이루는 일치를 세상에 드러내야 할
'표징이며 도구'(교회 1항)라고 선언했다.
'표징이자 도구'로 자신을 이해한 가톨릭교회는 본성적으로
성사적 구조를 지니고 있다. 교회의 볼 수 있는 구조들, 예를
들어 교계제도, 전례행위, 공동체 삶, 이웃 사랑의 실천을 통해
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 그리스도의 구원과 희망이 이
들 안에서 비로소 살아 있는 현실로 나타난다는 것을 고백한다.
가톨릭교회의 칠성사는 인간 구원을 향한 하느님 은총이 특별
한 시기에 특별한 사람에게만 내리는 선물이 아니라, 개인과
온 인류의 삶의 여정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임을 드러내는 표징
이다. 곧 누구나 탄생하고(세례성사), 성장하여(견진성사), 먹
고 살며(성체성사), 죄를 짓고 용서받으며(고해성사), 배우자
를 만나 신뢰를 약속하거나(혼인성사), 교회 공동체를 위해 평
생 헌신하기로 결심하고(성품성사), 질병의 고통과 죽음 속에
서도 하느님의 은총을 체험하는(병자성사) 생生의 모든 여정이
결국에는 하느님의 은총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것을 고백하고
선포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톨릭교회의 성사는 단순히 보이지 않는 하느님 은
총이 교회의 전례 행위 안에서 볼 수 있는 형태로 전달되는 일
종의 '통과의례'를 말하지 않고, 또 그래서도 안 된다. 성사란
가톨릭 신자라면 누구나 때가 되면 받아야 하는 그런 형식적인
교회 예절이 아니다. 부모의 신앙 때문에, 남들처럼 첫영성체
나 견진을 받을 때가 되었으니까, 싫지만 신자의 의무니까 미
사에 참석하고 때가 되면 고백할 것이 없어도 판공성사라도 봐
야 한다고 생각하고, 성체를 모시면서도 그 준비나 느낌을 가
질 겨를도 없이 살며, 때가 되어 성당에서 축복받는 결혼을 하
고 싶어 혼인면담을 청하는 그런 형식적인 가톨릭 신자의 관혼
상제 예절이 아닌 것이다.
가톨릭교회의 성사는 신자라면 누구나 '성사적인 삶'을 살아
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주는 교회의 신앙고백이다. 우리는 누구
나 하느님 은총 속에 살고 있지만, 그 은총은 신비종교나 뉴에
이지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마음속에 숨겨진, 그래서 '신비술
esoteric'을 통해서만 찾아낼 수 있는 자기 구원 능력과 평화
가 아니다. 은총은 하느님의 모습을 지금은 희미하게 볼 수밖
에 없지만 세상에서 볼 수 있고 감지할 수 있는 표징이나 사건
을 통해 느낄 수 있고 발견할 수 있으며, 삶 속에서 자신을 변
화시키는 힘이자 열정으로 '체험體驗'할 수 있는 살아계신 하
느님의 현존을 깨닫는 일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은 거부하거나 도피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숨 쉬고 살아계시며 끊임없이 자신을 선사
하시는 자리이다. 그분은 우리 시대의 감각적인 다양한 영상매
체 안에서 즐기는 '볼거리'나 '들을 거리' 안에 계시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가까이 있지만 좀처럼 우리가 보지 못하는 세상의
또 다른 '볼거리' 안에서 힘차게 말씀하시고 손을 내밀어 주신
다. 우리가 매주 성체를 모실 때, 성경 말씀을 들을 때, 나와 다
르지만 내가 몰랐던 새로운 인생의 희망을 살아가는 신앙인들
을 바라볼 때 그 안에 하느님의 은총이 우리에게 웅변처럼 다
가오고 있음을 읽어 낼 수 있다면, 우리는 진정한 가톨릭 신자
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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