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기도
오소서 성령님, 저에게 맑은 지력智力을 주시어 착한 목자를 따라가게 하소서.
세밀한 독서
일찍이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선민으로 계약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탈출 19,46) 그러기에 하느님만이 이스라엘을 돌보시는 유일한 왕이시며 목자요, 이스라엘은 그분의 양 떼로 표상됐습니다.(시편 23,1; 80,2 참조) 하느님께 불성실했던 이스라엘이 유배의 고난을 겪으며 의혹에 빠졌을 때, 예언자들은 하느님을 미래의 목자시며 당신 백성을 모아들일 착한 목자로 제시합니다.(예레 23,3; 31,10; 이사 40,11; 49,910; 에제 34,1116; 미카 2,12 참조) 그뿐만 아니라 하느님께서 다윗 가문의 한 인물을 선정하여 종말론적인 목자, 이스라엘을 다스릴 메시아를 보내주실 것을 약속했습니다.(예레 3,15; 23.46; 에제 34,2324; 37,24; 미카 5,14 참조) 이런 사회종교적 배경 안에서 “착한 목자”(1118절)로서의 계시는 예수님께서 하느님과 같은 분이심을 나타냅니다.
‘목자’는 양들과의 필수불가결한 관계 안에서 주어지는 직무인 만큼, ‘착한 목자’란 양들과 어떤 관계를 설정하고 있는지를 나타냅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11절) ‘내놓는다’는 동사는 양들을 위해 자발적으로 자기를 희생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자유의지가 표현된 단어로 온전한 희생과 영원한 사랑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양 떼를 돌보는 목자들 가운데 누가 ‘착한 목자’ 또는 ‘삯꾼’인지 분별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러나 양 떼가 위험에 처하게 될 때 그들의 행위에서 극명하게 드러납니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어 놓지만” 삯꾼은 위험 앞에서 “양들을 버리고 달아납니다.”(12절) 삯꾼은 목자가 아니라 고용된 일꾼으로 오로지 자신의 품삯과 안전만 생각하기 때문에 이리들이 양들을 물어가고 흩어버리는 것에는 아랑곳하지 않습니다. 이런 삯꾼은 율법에 집착하여 예수님의 말씀을 배척하고 서로의 영광만을 추구하는 유다 지도자들과 바리사이들을 떠올리게 합니다.(5,44; 12,4243 참조)
그러나 착한 목자는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10,14)는 확고한 내적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을 희생합니다. 여기서 ‘안다’는 것은 단순히 지적인 이해와 터득이 아니라 내외적인 체험을 통한 인격적인 일치를 의미합니다. ‘예수님과 양들’이 서로 ‘안다’는 것은 하느님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내적 친교, 곧 사랑의 관계에 그 근원을 두고 있습니다.(15절)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아시고 아버지께서도 예수님을 아는 확고한 신뢰 안에서 아들은 자유의지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하느님 아버지는 ‘목숨을 내놓을 권한과 다시 얻을 권한’을 아들한테 부여하시는 것입니다.(1718절) 이런 아버지와 아들의 존재적인 앎과 내적 일치를 통해 예수님은 ‘하느님을 안다.’고 선언할 수 있는 것입니다.(7,2829; 8,18.55 참조) 이와 같은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예수님과 그분을 따르는 모든 이들’이 이루어야 할 내적 친교의 원형일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양들을 위해 목숨을 내놓는 것은 “우리 안에 양들”뿐만 아니라 “우리 안에 들지 않은 양들”을 위한 것이기도 합니다.(10,16ㄱ절) 이런 예수님의 자발적인 희생은 하느님의 뜻에 따라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16ㄴ절) 예수님께서 이루려는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 곧 새로운 공동체는 양들이 ‘그 분의 목소리를 알아듣는 데서’ 시작됩니다. ‘듣는다’는 동사는 육화된 말씀에 대한 신앙의 순명을 의미합니다. 참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된 죽음, 부활을 아는 사람만이 착한 목자이신 그분의 목소리를 따라갈 것입니다.(필리 3,1011 참조) 그러나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지 못한다면, 후後 문맥에 이어지는 유다인들처럼 언제까지나 분열된 논란만을 거듭하며 서로의 울타리만을 높여갈 것입니다.(요한 10,1939)
묵상
‘듣는다’는 것과 달리 ‘안 듣는다’는 것이 신앙의 거부라면, 참으로 우리가 듣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듣고 싶은 것만 듣고 듣기 싫은 것을 외면한다면, 두 우리의 울타리를 무너뜨리고 어떻게 한 목자 아래 한 양 떼를 형성할 수 있을까요? 문득 ‘내 안에 내가 너무도 많아’ 하는 노랫말이 생각납니다. 그 많은 소리 가운데서도 ‘주님의 목소리를 알아듣고’(요한 10,16ㄷ) 그분을 따라가고 있는가, 아니면 내 욕망의 소리를 들으며 내 길만을 고집하고 있는지요? 자기 자신의 소리에만 충실하다면, 나를 위해 목숨 바치는 착한 목자이신 그분을 우리는 어디서 만날 수 있을까요?
기도
주님은 나의 목자, 나는 아쉬울 것 없어라. 저의 한평생 모든 날에 호의와 자애만이 저를 따르리니 저는 일생토록 주님의 집에 사오리다.(시편 23,1.6)
반명순 수녀(툿찡 포교 베네딕도 수녀회 대구수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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