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속으로
이제민 지음
하느님을 만나게 해준 사람들
얼굴
거울은 사람의 얼굴만이 아니라 마음까지도 비춘다. 나는 가
끔씩 사람은 제 산 모습대로 죽는다는데 죽을 때 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하고 쓸데없는 상상을 해보곤 한다. 세속적인 생
각이겠지만 세상에 부러운 사람이 있다면 "참 평온한 얼굴을 하
고 죽었다." 하고 길이 기억되는 사람이 아닐까? 나도 사람들에
게 그런 모습으고 남고 싶다. 생을 마칠 즈음의 내 얼굴이 풍랑
중에도 여유롭게 주무실 수 있었던 예수님의 얼굴을 할 수 있
다면 얼마나 좋을까! 평온한 얼굴로 죽고 싶다. 진선미의 얼굴
로 세상을 살고 싶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의 얼굴을 하고 우리 인간에게 다가오신다.
인간의 얼굴을 외면하고서는 결코 하느님을 뵐 수 없다. 하느
님은 보잘것없는 아기의 모습으로 우리 인간 세상에 오셨다. 이
아기의 얼굴을 보고 "주님의 구원을 제 눈으로 보았습니다. 만
민에게 베푸신 구원을 보았습니다." (공동번역 루카 2, 29)라고
하느님께 찬미를 드릴 수 있었던 시메온은 이제 죽어도 한이 없
다고 노래하였다.
스위스의 주보성인 클라우스는 문맹이었다. 글을 읽을 줄 몰
랐기에 '명상그림'을 보면서 성경을 묵상하곤 하였는데, 그는
'명상그림' 속의 하느님께서 인간의 얼굴을 하고 계신 데 놀라
움을 금치 못하면서 커다란 위로를 느꼈다고 한다. 발가벗은 아
기의 모습으로 인간 세상에 들어와 십자가에서 처참하게 죽어
간 사형수의 얼굴이 하느님의 얼굴이라는 놀라운 사건 앞에서
클라우스는 우상숭배를 따지기보다 하느님의 사랑을 느끼며 감
사했던 것이다. 그에게 세상은 하느님의 얼굴이었다. 그러기에
세상 사람이 미울수록 더욱 사랑하라고 이른다.
"어떻게 보이는 형제를 미워하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사
랑한다고 할 수 있습니까?"
미켈란젤로가 최후의 만찬을 그리기 위해 선택한 예수님의
모델과 나중에 유다의 얼굴을 그리기 위해 찾아낸 모델이 같은
인물이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나는 이 일화가 반대로 진행되
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해보곤 한다. 처음에 예수님 같았
던 얼굴이 유다의 모습으로 변해간 것이 아니라 유다의 얼굴을
가졌던 사람이 점차 예수님의 얼굴로 변해갔다면 얼마나 좋았
을까!
30년도 더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유학할 때의 일이다. 한 사
람이 한국인의 얼굴에는 항상 웃음이 가득해서 만날 때마다 호
감이 간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다른 부인이 자기는 한국인이
웃으며 다가오면 지레 겁부터 난다고 했다. 얼굴은 웃음을 짓
지만 그 뒤에 뭔가가 감추어져 있는 듯하고, 그게 언제 폭발할
지 몰라 두렵다는 것이었다. 한국에도 여러 번 다녀왔고, 전쟁
으로 피폐해진 한국을 돕기 위해 모금운동도 적극 나섰던 분의
말이라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그 후 방학이 되어 몇 년 만에 고국을 찾았을 때 나는 그 부
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공항을 빠져 나오는 순간 내게 비
친 우리의 얼굴은 너무도 경직되고 무표정했다. 쫓기듯 바삐
움직이는 모습들을 보자 부인의 말이 떠올랐다. 얼굴에 가득한
불만이 언제 터질지 모르게 보여 나도 겁이 났다.
마리아는 성령으로 아기 예수님을 잉태한 후 친척 엘리사벳
을 방문한다. 엘리사벳은 마리아를 보자 "여인 중에 복되시며
태중의 아들 또한 복되시다"하고 찬사를 보낸다. "너는 세상에
서 가장 행복한 여인이야!" 하며 감탄하는 것이다. 마리아가 어
떤 얼굴을 하고 있었기에, 마리아의 자태가 어떠하였기에 엘리
사벳은 그렇게 감탄하였을까? 마리아의 내면에 흐르는 웃음이
라도 본 것일까?
남에게 비친 나의 얼굴은 어떤 모습일까? 클라우스처럼 휘
둥그런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표정을 하고 있을까, 마리아
처럼 잔잔한 웃음으로 감동을 자아내는 얼굴일까? 나는 아직
클라우스나 마리아의 경지에 이르지 못했다. 그런데도 그분들
의 영성을 통해 사람들을, 예수님을, 하느님을 뵙기를 간절히
원한다.
하느님께서 인간의 얼굴을 하고 계시기에!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