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7. 고통은 영광의 산실, 시련
03 시련(3) - 사제서품 보류
"부제님은 사제서품이 보류되었습니다. 대구 주교
님한테 가면 이유를 설명해 주실 것입니다."
청천벽력이었습니다. 당시 학장이셨던 한공렬 신부님이 내게 한 말
씀입니다. 사제서품을 준비하기 위해 피정도 마친 상태였습니다. 본
당에서는 한 달 후에 있을 사제서품 축하잔치도 준비 중이었고 초청
장도 발송했고 기념 상본도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너는 너무 건방지고 말을 함부로 해, 고생을 좀 해야 하니 논산훈
련소에 가는 것이 좋겠다."
서정길 대주교님이 흥분해서 나를 꾸짖으셨습니다. 아무 말도 못하
고 물러나와 내가 무엇을 잘못했나 곰곰이 생각했습니다. 한 주일이
지나자 내가 방학 때 본당에서 생활하면서 했던 농담이 생각났습니다.
"만약 내가 신부가 된다면 엄지손가락에 장을 지지지. 절대로 나는
신부가 되지 않을 거야."라고 말했던 것입니다. 농담치고는 지나쳤다
는 것을 뒤늦게 깨달았습니다.
그때 나를 은근히 좋아하던 노처녀 선생님이 이 말을 들었는데, 아
마도 내게 애인이 있어서 그런 말을 하는 줄로 착각하고 본당 신부님
에게 고자질을 한 것입니다. 이것이 화근이 되어 교구청에서 조사위
원이 현장에 와서 조사하고 회의도 했다고 합니다. 당시 본당 신부님
과 협의해서 내린 결론은 실제로 사제가 되는 데 결정적인 결격사유
는 없지만 '말을 함부로, 농담을 지나치게' 하는 것은 사제의 신분에
적합하지 않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잘못을 깊이 뉘우치면서 나는 집에 돌아왔습니다. 추운 겨울이었지
만 나는 매일 성당 바닥에 초를 칠하고 광택이 나도록 닦고 또 닦았습
니다. 유리 창문까지 청소하면서, 보속하는 마음으로 한 달을 지냈습
니다.
"왕 부제님, 본당에 가서 우리와 함께 지냅시다."
나는 대구 삼덕동 성당에 가서 움막 같은 집에 기거하면서 성당 청
소도 하고 예비자 교리반을 맡아서 열심히 했습니다. 본당 신부님이
내가 하는 교리반을 좋게 평가해주었고 나도 재미와 보람을 느꼈습니
다. 말씀을 전하고 신앙을 심어주는 예비자 교리반은 사제로서 미사
와 고해성사를 집전하지 못하는 안타까움을 잊어버릴 만큼 나에게 커
다란 기쁨이었습니다. 그만큼 예비자 교리반은 내가 전념할 수 있는
좋은 몫이었습니다.
'양키시장'과 '칠성시장'의 시장 교리반을 만들어 직접 찾아가서
가르쳤고 '수성동 공소'에 노인 교리반까지 개설해서 한 주간에 24시
간 정도 교리를 가르쳤습니다. 그렇게 말씀 속에서 힘든 시련의 시기
를 극복할 수 있도록 놀랄 만한 새 지평을 열어주신 성령께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1년 후에는 부산의 최재선 주교님이 불러서 부산 교구로 이적했습
니다. 진해 중앙 성당에서 3년 동안 재임하면서 '중앙시장' 교리반과
'도만동 관사'의 소령, 중령(해군)들을 대상으로 한 교리반도 성실하
게 또 재미있게 했습니다. 본당에서는 고등학생 교리반을 성공적으
로 마쳐서 많은 수의 진해여고 학생들이 세례를 받았습니다. 마치 교
회가 운영하는 학교처럼 각 반마다 우수학생의 반 이상이 세례를 받
았고 성당에 다니는 것이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습니다.
신학교 동기들보다 몇 년 이나 늦었지만, 내가 1965년도 사제서품
을 받고 범일 성당에 부임해서 예비자 교리반을 개설했을 때 시련 가
운데 축적된 경험과 능력은 엄청난 결과로 나타났습니다. 1,000여
명의 예비자가 몰려왔는데 첫 날은 반 편성하고 기록한다고 교리를
가르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구호물자도 끊기고 전교 황금기가 지났다고 교회 안팎에서 결론지
었던 때였지만 이곳 범일 성당의 예비자 교리반을 보고는 전교의 황
금어장은 아직도 살아 있고, 하면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새로운 인식
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4년 동안의 시련 속에서 나는 내 일생을 통해 간직해야 할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 하나가 '사제가 농담은 할 수 있지만 절대로
한계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련 후에 주시는 기쁨과 영광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크고 은혜로우며, 시련은 그 자체로 은총이라
는 교훈을 가슴 깊이 새기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기뻐하십시오. 여러분이 지금 얼마 동안은 갖가지 시련
을 겪으면서 슬퍼할 수밖에 없겠지만 그것은 여러분의 믿음을 순수하
게 만들기 위한 것입니다. 결국 없어지고 말 황금도 불로 단련을 받습
니다. 그러므로 황금보다 훨씬 더 귀한 여러분의 믿음은 많은 단련을
받아 순수한 것이 되어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시는 날에 칭찬과
영광과 영예를 차지하게 될 것입니다."(베드로전서 1,6-7)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