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이 뛰면 아내도 같이 뛰어야 합니다. 아내가 뛰면 남편도 같이 뛰어야 합니다. 한쪽은 뛰는데 한쪽이 뛰지 않으면 뛰지 않는 쪽은 뛰는 쪽을 잡아당기는 고삐가 됩니다.”(이규경). 따라서 뛸 때는 같이 뛰고, 쉴 때는 같이 쉬는 배려가 필요합니다. 새로 산 와이셔츠보다 빨아 입은 와이셔츠가 더 눈부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그 옷에는 옷을 빤 사람의 정성이 배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일상 안에서의 사랑입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시로 표현 했는데 “이년, 저년, 못된 년,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년” 하고 썼습니다. 여자분들이 기분 나쁘다고요? 그럼 ‘이놈, 저놈, 못된 놈, 미워할 수 없는 나쁜 놈’ 이라고 하지요. 여자를 무시하는 것이 아니라 이러니 저러니 해도 함께해야 한다는 사랑의 마음을 담았습니다.
우리가 일생을 ‘사랑하며 산다.’는 것은 말같이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를 사랑하신 주님이 계시기에 그 사랑을 살 수 있는 힘을 바로 예수님에게서 얻을 수 있습니다. 아니 얻어야 합니다. 오늘 2독서의 말씀대로 ‘하느님께서 당신의 외아드님을 세상에 보내시어 우리가 그분을 통하여 살게 해 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친구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 놓는 것보다 더 큰 사랑은 없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에 머물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모습을 지니셨지만 하느님과 같음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시고 오히려 당신 자신을 비우시어 종의 모습을 취하시고 사람들과 같이 되셨습니다. 이렇게 여느 사람처럼 나타나 당신 자신을 낮추시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십자가 죽음에 이르기까지 순종하셨습니다.(필리2,6-8).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몸소 씻어주시며 사랑을 보여주셨고 제자들을 당신의 벗으로서, 친구로 사랑하셨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십자가의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이셨습니다. 바로 그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우리를 위한 사랑 때문에 몽땅을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을 살아야 합니다.
일상 안에서 예수님의 사랑을 산다는 것, 친구를 위해 목숨 내 놓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을 위한 희생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사랑 안에서 나온 희생은 수고로움이 없습니다. 그리고 조금도 피로하지 않고 또 남을 피로하게 만들지도 않습니다. 만일 수고를 느끼고 혹 내가 이만큼 했으니 너도 이 정도는 해야 된다는 마음을 느낀다면 아직도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지 못한 것입니다.
사랑이 어떻게 생겼을까요? 성 아우구스띠노는 말합니다. “사랑은 남을 돕는 손을 가졌으며, 가난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재빨리 달려가는 발을 가졌으며, 곤란에 처한 사람을 알아보는 눈을 가졌으며, 사람들의 한숨과 슬픔을 경청하는 귀를 가졌습니다.”리지외의 성녀 데레사 수녀님은 “작은 희생을 할 수 있는 단 한 번의 기회조차 놓치지 마십시오. 여기서는 미소로, 저기서는 친절한 말 한마디로 항상 작고 바른 일을 행하면서 그 모든 것을 사랑으로 하십시오.”하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희생을 전제합니다. 이기적인 마음이 있는 곳에는 진정한 사랑이 없습니다. 희생을 먼 곳에서 찾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작은 배려와 희생이 있는 곳에 하느님이 계십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
제가 꽃동네에 있을 때의 일입니다. 노인 요양원에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 한 분이 계셨습니다. 앞을 못 보시니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자주 방 한 구석에 웅크리고 앉아 계셨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다리가 없으셔서 휠체어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할아버지께서 그 방에 오시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날부터 그 방은 빛나기 시작했습니다. 앞을 보지 못하시는 할아버지가 휠체어를 밀고 산보를 시작한 것입니다. 다리가 불편한 할아버지는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를 통해 혼자서 휠체어를 굴리기 힘들어하는 불편을 이겨내게 되었고, 앞을 보지 못하는 할아버지는 맑은 공기를 마시며 적당한 운동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작은 관심이 큰 사랑의 열매를 맺게 한 것입니다.
아우구스티노성인은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의 눈이 맑아져 하느님을 뵈올 수 있는 능력을 받게 됩니다.……사랑하십시오. 그리고 하고 싶은 대로, 원하는 대로 하십시오!” 하고 말했습니다. 사랑은 결코 지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사랑을 산다는 것은 어떤 요구나 생색내기 없이 그저 베푼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당신의 모든 것을 내 놓았듯이 나도 나의 모든 것을 이웃을 위해 내 놓을 수 있어야하겠습니다. 사랑은 사랑자체가 하느님으로부터 주어진 보상입니다.
한 연세 많은 신부님께서 임종직전에 말씀하셨습니다.“내가 천국에 들어가는 순간 3번 놀랄 것이다. 첫 번째는 전혀 예상치 못한 사람을 천국에서 만나게 될 때이고 두 번째는 내가 마땅히 천국에 갈 것이라고 예상했던 사람들이 그곳에 없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이다. 그리고 세 번째는 내 자신이 바로 그곳에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이다.” 예상치 못한 사람을 만났다는 것은 아마도 그가 드러내지 않고 사랑의 삶을 살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반면에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은 아마도 그는 겉과 속이 다른 삶을 산 사람일 것입니다. 겉은 화려하였지만 속을 채우진 못한 탓일 것입니다. 내가 거기 있다는 것에 놀랐다는 것은 내가 나 자신을 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공로가 아니라 누군가의 도움과 희생, 하느님의 자비로 거기에 있다는 것을 일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여기서부터 영원을 살아야겠습니다. 말로나 혀끝으로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실하게 사랑을 다져가야겠습니다. 주님은 사랑이시고 우리 사랑의 근원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힘을 빌어서 많이많이 사랑하시기 바랍니다. 진실한 사랑은 결코 한가로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사랑에는 두려움이 없습니다. 완전한 사랑은 두려움을 쫓아냅니다.”사랑의 속성은 아낌없이 베푸는 것이요, 또한 일회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입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고 그분은 언제나 나의 하느님이시기 때문입니다. 사랑합시다.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