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8. 사목 현장에서 만난 주님
08 예수 중심의 삶
"신부님, 지금 저는 큰 고민에 빠져 있습니다. 눈을
감으면 김수환 추기경님이 나타나 어른거리고, 눈을 뜨면 김영삼 대
통령이 앞으로 다가서서 가로막고 있습니다. 누구의 뜻을 따라 현 사
태를 처리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명동 성당에 공권력을 투입하기
위한 법원의 사전 영장은 이미 떨어져 있고---. 정말 어떻게 해야 할
지 난감합니다."
과거 성서백주간 모임을 주선했던 교우와 전화통화를 하던 중 그
가 걱정스런 목소리로 내게 말했습니다. 검찰 총장직에 임명된 지 몇
달되지 않은 시기에 '신앙과 현실' 사이에서 사법적이고도 정치적인
예민하고 중대한 문제에 직면해서 전화로 하소연을 해온 것입니다.
"김 베드로 회장님, 신앙생활 50년, 검찰생활 근 30년을 하시고도
이 문제로 고민을 하십니까? 김 추기경님이나 대통령이 중요합니까?
그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분이 누구십니까? 크고 작은 모든 일의 판
단 기준이 누구입니까? 하느님이 이 사태를 어떻게 하기를 원하시는
지, 그 뜻에 따라서 문제를 해결하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분의 뜻을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습니까? 그리고 그 뜻을 현실
적으로 받아들이기가 힘든 상황입니다."
"마침 지금이 사순시기 아닙니까? 단식하고 기도하면서 주님께 겸
손하게 여쭈어 보십시오. 그분은 기도에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점심
시간에 대검찰청 앞에 있는 서초 성당에 가서 성체 앞에서 한 시간 정
도 기도해 보세요. 일주일이라도 해보면 좋겠네요."
그는 내 권고를 받아들여 그 이튿날부터 점심시간에 식사도 하지
않고 서초 성당에 가서 기도했다고 합니다. 3일쯤 지나니까 검찰청
내에 소문이 났습니다. 검찰 총수가 단식하면서 기도하고 있는 것
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대검찰청의 분위기가 바뀌었고 검찰 간부들
이 모두들 그 문제에 대해 신중한 태도로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4일 기도하던 그가 결단을 내릴 참이었습니다. 바로 그날
청와대에서 김 대통령의 전화가 왔습니다.
"총장님, 명동 성당에 진입하지 않도록 합시다. 나도 야당생활 때
그곳을 민주화를 위한 성지라고 생각했는데 그 명동 성당에 내가 경
찰을 동원하고 진입해서, 불법적인 단체 행동이지만 강제로 체포하
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간 수고 많았습니다."
단식하면서 주님의 뜻을 알고자 간절히 기도하는 동안 하느님은
대통령의 심경에 변화를 일으키시고 문제를 자연스럽게 해결해주신
것입니다. 사순적의 단식과 기도가 얼마나 중요하고 예수 중심의 삶
이 얼마나 은혜로운가를 깨닫게 되었다고 검찰 총장은 내게 감사했
습니다.
그 후 나는 서울에 갈 일이 있어서 난생 처음 검찰 총장실을 방문
했고 이례적으로 사무실 축복예식을 했습니다. 아마도 그런 일은 처
음 있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기도하면서 성수를 사방에 뿌리고 나니
김 총장이 "성수는 왜 부리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검찰청에 마귀가 많은데 특히 총장실에 악질 사탄이 많은 것 같아
서 그러했습니다."
"네, 그러십니까?"
그러고 나서 우리는 시원하게 웃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