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8. 사목 현장에서 만난 주님
15 내가 살아야 할 이유
1981년 서울의 삼각산 예수회 수련원에서 9박 10일
피정을 했습니다. 성령 안에서 지난 몇 년 동안의 삶을 정리하고 새로
운 시작을 하고 싶었습니다. (이때가 콜럼버스에서 신시내티로 갈 즈
음임.)
오직 말씀 안에서 말씀을 묵상하고 실천하면서, 고해성사도 성실하
게 준비해서 보고, 은총 가운데 한동안 잠겨 있었습니다.
그런데 피정을 마치기 전날, 초봄의 햇살을 받으면서 정원에 앉아
있다가 무심코 발밑에서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는 개미들을 보았습니
다. 이렇게 신비로운 모습이 바로 내 앞에서 펼쳐지고 있다는 사실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그걸 모르고 살고 있었다는 걸 새삼
알게 됐습니다. 눈앞에 보이는 정원수에서 돋아나는 새잎도 너무나
고맙고 예쁘게 보였습니다. 저 멀리 서울의 전경도 아름답게만 느껴
졋습니다.
보는 것이나 느끼는 것이나 생각하는 모든 것들이 모두가 아름답고
좋게만 보였습니다. 내 안에 이런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
은 무엇인가? 내가 정말로 변한 것인가? 그렇다면 내가 얼마나 어떻
게 변했는지 시험해보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 일생 동안 도저히 수
용하기 힘들고 용서하기가 불가능할 것 같은, 그래서 다시는 만나고
싶지 않은 몇 사람을 차례로 떠올려보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사람들
에 대한 어떠한 미운 감정이나 분노가 이미 사라지고 없었습니다.
지나간 날은 하나의 연극이었구나, 인생이라는 무대에 나도 그들도
같이 등장했고 연출자의 각본대로 연극을 한 것에 지나지 않았구나 하
는 생각이 들면서 이제는 무대에서 내려와 각자 자기의 현실로 다시 돌
아갔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순간 나는 내가 꿈을 꾸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 눈을 부비고 목을 흔들어보았습니다. 마음이 참 편안
했습니다. 그 사람들을 미워해야 할 이유가 완전히 없어졌습니다. 나
의 내면에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습니다.
나는 그날 '앞으로 내가 계속해서 살아가야 할 이유가 있다면, 그것
은 하느님이 나를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내 노트에 적어놓았습니다.
하느님이 나를 소중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내 인생을 보람 있게 영위 해
야 한다고 기록했습니다.
내 삶의 핵심은 사랑이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이 내 마음 안에 살
아 있을 때, 하느님의 사랑이 내 안에서 꽃피고 있을 때, 나는 이 세상
에서 행복하게 살아갈 수 있습니다. 나는 더 보람 있고 기쁘게 살아야
하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오로지 하느님의 사랑에 응답하고 그 사랑을
실천하면서 살아간다면 보다 더 행복한 삶을 살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세상의 어떤 것을 주고서라도 바꾸지 말아야 할 것은 오직 하느님
의 사랑, 그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과 희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언제까지나 남아 있을
것입니다. 이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1고린 13,12-13)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