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사제 생활 50년의 단상
왕영수 신부 지음
8. 사목 현장에서 만난 주님
16 내 마음속의 주님 상처
지금은 의정부 교구장이신 신학교 동기 신부님을
지도자로 모시고, 나는 지나온 세월 동안 수시로 체험하고 느꼈던 영
성생활을 총 정리하는 피정을 가진 적이 있습니다. 그때 수원에 있는
말씀의 집에서 30일간의 이냐시오 영성 피정 중에 받은 은혜는 1987
년 나의 안식년을 의미 깊게 해준 소중한 체험이었습니다.
마치기 4일 전, 나는 예수님의 수난에 대해 묵상했습니다. 예수님의
피땀 흘리심, 매 맞으심, 사람들의 모욕과 천대와 멸시받으심, 십자가
에 못 박혔을 때 비웃음과 조롱당하심 등 예수님의 수난과 고통을 생
각하면서 그것을 달게 받으며 살겠다는 다짐을 하는 묵상이었습니다.
"예수님, 저도 당신처럼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에 무시, 천대, 배
신, 모욕, 조롱 이런 것을 달게 받겠습니다. 당신께서 가신 그 길을 저
도 걸어가겠습니다."
지도 신부님의 말씀에 따라 아침에 이 기도를 했는데 별로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오후에 다시 성체 앞에서 이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
데 이런 기도를 그만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지만
이 기도를 통해 어떤 체험을 해야 한다고 생각한 나는 밤 열한 시 반에
성당에 들어가서 다시 큰 소리로 기도했습니다.
"예수님, 제가 당신처럼 사람들에게 은혜를 베풀고도 받았던 온갖
인간적인 배신과 모든 영적인 고독감도 달게 받겠습니다."
아무런 감동도, 응답도 없었습니다. 다시 두 번째 기도를 큰 소리로
했습니다.
두 번째 기도가 막 끝나려는 순간 내 입에서 엉뚱한 말이 튀어나왔
습니다.
"아이고, 사람 잡겠네. 환장하겠네."
나는 깜짝 놀랐습니다.
앞에 했던 내 기도는 내가 이성으로 꾸며서 한 것이고 뒤에 탁 튀어
나온 것은 내 마음속에 있던 진정한 나 자신의 소리였습니다. '지금까
지 이렇게 겉 다르고 속 다른 기도생활을 해왔구나.' 나는 자괴감을 느
끼며 돌아서 나왔습니다.
깜빡 잠이 들었던 듯, 아니면 깊은 잠 속에서 꿈인 듯 환시인 듯 나
는 무언가에 놀라 튕기듯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십자가가 자꾸 내 앞으로 다가오는데 가만히 보니 예수님이 성혈
이 낭자한 모습으로 십자가에서 고통스럽게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사
람의 형체라고는 볼 수 없는 예수님의 얼굴 모습과 신음소리, 머리와
가슴, 팔과 손에서 뿜어져 나오는 성혈이 내 얼굴에 확 튀어서 너무
놀라 잠에서 깼던 것입니다. 새벽 2시였습니다.
나는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예수님이 이렇게까지 힘드셨구나,
이런 고통을 겪으시며 자신을 희생하셨구나, 지금까지 십자가를 하
나의 상징물로, 장식용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느님의 아
들이니까 십자가에서 못 박혀 돌아가시는 것이 뭐 그리 힘들었을까 생
각하며 편안하게 바라보지 않았던가.'
이제까지 내가 생각하던 십자가와 내가 꿈에 환상으로 본 십자가의
모습은 너무나 달랐습니다. 예수님이 받으신 그 고통의 충격 때문에
나는 잠을 잘 수 없었고 아침식사도 하지 못했습니다. 나는 성당에 가
서 성체 앞에 앉았습니다.
예수님의 고통스런 모습과 내 얼굴에 튀어오던 그 피를 떠올리며
십자가의 고통을 오랫동안 묵상했습니다.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자기 자신을 희생했던 그 사랑이 얼마나 극진
했으면 저 고통을 참고 받으셨을까?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비참한 예수님의 모습을 만날 수 있었던 새벽 2시의 이 거룩한 체험
은 내 영적 여정을 정리한 또 한 번의 계기가 되었고, 말씀을 심화하
는 묵상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자주 십자가의 길을 묵상하고 기도합니다. 그때 우리는 "어
머니께 청하오니 제 마음속에 주님 상처 깊이 새겨주소서."라고 노래
합니다. 이 기도가 그때 제게 실현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거룩한 십자
가의 고통에 내가 동참할 수 있게 해준 그 피정을, 그 예수님의 성혈
을 20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생생하게 느끼고 있습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