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1 "안 된다니까, 그래!"
"안 된다니까, 그래!"
내가 대전사범학교에 다닐 때 학교 후문 근처에 있는 빵집아저
시의 별명이 "안 된다니까, 그래"였다. 가난한 젊은 부부가 작은
판잣집에서 찐빵과 도넛을 만들어 파셨는데 맛이 아주 좋았으며
값도 쌌기 때문에 학생들이 떼지어 몰려들곤 했었다. 다만 '외상
은 절대사절'이라는 주인아저씨의 고집이 우리를 자주 슬프게 했
다.
친구라는 것이 그랬다. 저쪽에서 빵을 샀으면 이쪽에서도 한 번
쯤 내야 하는데 나는 돈이 없어 늘 얻어먹기만 하려니까 창피하고
비굴할 때가 많았다. 그래서 몇 번 회상을 시도해 보았지만 빈번
이 거절당했으며 소용이 없었다. 그때 주인아저씨가 늘 하시던 대
답이 "안 된다니까, 그래!" 였다.
그러나 다른 한편 아저씨의 그 대답이 고마울 때도 있었다. 사실
외상을 먹는다 해도 갚을 능력이 별로 없었기 때문에 그 정도만 해
도 친구들에게 인사치레는 충분했기 때문이다. 우리 집은 그때 동
생의 병 때문에 빚이 많았었다. 용돈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는 시
절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이었다. 내가 하도 불쌍하게 보였는지 어쨌는지
모르지만 송곳 하나 들어갈 틈이 없던 아저씨가 자청해서 외상을
주겠다는 것이었다. 천지가 개벽할 일이었다. 그래서 그 날은 "펑!"
소리가 나도록 친구들에게 겁 없이 쓰면서 실컷 먹었다. 세상에 두
려울 것이 없었다.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외상을 먹어 본 사람은 다 경험한 일이지만, 먹을 때야 신이 나
고 재미있지만 막상 갚을 때가 되면 생돈을 버리는 것처럼 아까운
것이 또 외상이었다. 더구나 돈이 마련되지 못할 땐 주인을 피해
다녀야 하기 때문에 나는 학교를 정문이나 후문으로는 감히 다닐
엄두를 못 내고 철조망 신세를 자주 져야만 했었다. 왜냐하면 아저
씨와 아주머니가 학교 정문과 후문을 딱 지키고 있었기 때문이었
다.
외상 빚을 갚을 돈 마련은 항상 막연했다. 부모님이 무슨 용돈을
주시는 것이 아니기에 어디서 생겨날 구멍이 없었고, 방학이면 가
끔 시골 할아버지 댁에 가기도 하지만 겨우 몇 푼 타 오는 것이 고
작이었다. 그래서 조그만 철물점을 하시는 할아버지의 돈통에서
돈을 훔친 일도 여러 번 있었다.
나는 사실 청소년 시절부터 전과가 많았다. 수업시간에 남의 도
시락을 까먹는 일은 다반사였고 친구들의 콘사이스를 빼내어 팔기
도 했으며 학교의 수도꼭지도 비틀어지기만 하면 풀어다가 돈을
만들곤 했었다. 그러다가 3학년 때는 술집에서 학생과장을 만나
무기정학을 당하기도 했는데 그때 아버지께서는 그 학교의 선생이
었는데도 나는그처럼 구제불능이었다.
좌우간 그 뒤로 외상을 몇 번이나 더 먹었는지는 모른다. 다만
꽤 신용을 지키다가는 졸업 말기에 외상을 크게 한 번 걸어 놓고는
그대로 떼어먹고 말았다. 그때는 또 그렇게 하는 것이 빵집아저씨
에 대한 일종의 보복이었다. 그놈의 외상 때문에 굽실거리고 자존
심 상했던 것을 생각하면 그 이상의 것이라 해도 분이 안 풀렸을
것이다.
졸업을 하자 나는 섬마을 학교로 지원하여 충남 당진군에 있는
'대난지도' 라는 서해안의 작은 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 후 학
생시절의 '외상' 문제 따위는 까맣게 잊고 새로운 세계에 몰두하게
되었는데 그때 섬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은 참으로 재미있었다. 그
리고 그때는 또 선생이 동네 유지(?)여서 가끔 정중한 초대를 받곤
했다.
마을에서 초대가 오면, 먹을 것이 항상 부족했던 나로서는 돈 안
들이고 실컷 마시고 배 터지게 먹는 기회가 되었다. 시골에서는 생
신, 회갑, 돌, 제사 등이 줄을 잇고 있었으며 모내기나 추수 때 등
술 마실 일들이 많아서 그때마다 선생은 귀빈으로 초청되어 안방
에서 큰상을 대접받곤 했었다. 그때는 이장이 제일 높았으나 선생
끗발은 그보다 한 수 위였다.
지금도 기억하는데, 그때의 내 식사 정량이 밥 두 사발에 국 세
그릇, 그리고 말걸리 한 주전자였다. 나는 매끼마다 그렇게 먹었으
며 그때의 밥 주발은 안에 담긴 것보다도 위로 올라앉은 양이 더
많았던 시대였다. 그리고 공밥이나 공술이 없는 날은 굶을 수 있는
데까지 굶으며 지냈다. 자취 쌀이 늘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섬마을 선생 3년을 하자 군에 입대하는 문제가 생겼으며 바로
그 시기부터 섬마을 선생을 우대하는 교육정책에 따라 나는 운 좋
게 대전시로 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참으로 큰 행운이었다. 대
전은 아무나 들어가는 곳이 아니었다. 시골에서 적어도 10년은
고생을 해야 내신을 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전으로 발령
받고 얼마 후의 일이다.
그때 사범학교 정문 쪽으로는 부속초등학교가 있었고 후문 쪽
으로는 서대전초등학교가 있었다. 나는 바로 서대전초등학교를
졸업했는데 묘하게도 모교로 발령을 받아 내가 졸업할 때 계셨던
선생님들과 함께 2학년 담임을 하게 되었다.
학기 초였다. 하루는 오전 수업을 끝내고 가정방문을 하는데 평
소에 유독 나를 따르던 예쁘장한 여자아이가 동행하게 되었다.
그때 나는 일부러 다른 아이들의 집부터 먼저 돌고 맨 나중으로
아꼈던(?) 그 아이의 집을 찾았는데 그 아이가 "아버지!" 하고 집
으로 달려가서 끌고 나온 사람은 다름 아닌, "안 된다니까, 그래"
바로 그 아저씨였다!
"워어매!"
원수는 외나무다리에서 만난다더니 그때 내 상황이 바로 그랬
다. 나도 당황했지만 그분은 나보다 더 당황했다. 집이 그 쪽이 아
니었는데 그동안에 아마 이사를 한 모양이었다. 간신히 내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아저씨, 외상값 안 가져왔습니다!"
그러자 아저씨가 죄송하다는 듯이 머리를 숙였다.
"선생님, 저도 이젠 빵 장사 안합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