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남 속으로
이제민 지음
하느님을 만나기 위하여
순교자의 마음
어느 새벽, 그렇게 추운 것 같지 않은데 길가에 세워둔 자동
차 창문에 서리가 끼었다. 걸어서 30분 정도 거리에 있는 성당
공원묘지에 가니 잔디 위에도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았다.
산마르코
1866년 병인박해가 막 끝난 후 1월에 고향 명례에서 잡혀
대구 감영으로 끌려가 혹형과 심문에도 굴하지 않고 신앙을 고
수하다 2월 27일에 교살되어 위주 치명하였다. 당년 나이 39세.
비석에 새겨진 글이다. 만상이 얼어붙은 추운 겨울, 공꽁 언
몸에 매를 맞아가며 문초를 당하는 장면은 생각만 해도 몸서리
가 쳐진다. 내가 그때 그와 함께 있었다면, 아니 붙잡히기 전에
함께 있었다면 나는 어떻게 하였을까? 숨어 사는 몇 명의 신자
들을 몰래 불러 놓고 함께 미사 드리며 다음과 같은 강론을 하
였겠지 ---.
"하느님 나라가 다가왔습니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으십시
오. 이것이 예수님 가르침의 핵심입니다. 우리가 이런 고생을
감내하고자 하는 것은 예수님의 이 복음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것이 정말 복음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이 복음을 받아들이기를 목숨을 바쳐 간절히 원하고 있
습니다. 무조건 믿으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예수님 때문에 맹신과 광신에 사로잡히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
다. 우리가 당하는 고통은 맹신 때문도, 광신 때문도 아닙니다.
이 고통 가운데 하느님 나라를 체험한 사람은 정말 행복합니다.
하느님은 이런 행복의 은총을 주시기 위해 우리에게 이런 아픔
을 주셨습니다. 당신의 외아들 예수님에게 십자가의 은총을 주
셨듯이 말입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이 이 진리를 깨닫는 날이
오기를 바랍니다."
당시 그는 그가 세례명으로 얻은 마르코가 하늘나라가 가까
이 왔다는 예수님의 복음을 마음에 새기며 자기 복음서 제일
앞에 기록한 사람이라는 사실도 잘 몰랐을 것이다. 19세기에
살았고 그것도 소금 장수였던 그가 21세기에 설교하는 내 이
야기를, 소위 신학자의 강의를 알아들었겠는가? 지금 나와 함
께 지내는 동료들도 내 말을 알아듣기 어려워는데 말이다.
그러나 그는 내 말을 잘 알아듣지 못했더라도 나의 설교가 하
느님의 음성이라도 되는 양 마음에 새겼을 것이다. 진리는 인간
의 머리와 세기를 초월하여 인간의 마음에 스며든다. 그 진리가
아우구스티누스를 통해 나오든, 토마스 아퀴나스를 통해 나오
든 결국 그와 같은 단순한 마음을 통하여 세상에 전달된다. 신
앙인은 지식인이 아니다. 신앙은 지식으로 전달되는 것이 아니
다. 신앙은 마음으로 전달되고 받아들이는 것이다.
순교자 신 마르코, 그는 학자에게 대중의 마음을 일깨워준다.
나는 그의 묘지 앞에서 새벽의 여명을 뚫고 들려오는 그의 음성
을 듣는다. 무릎을 꿇고 내 신앙을 부끄러워한다. 그리고 스스
로를 향해 마음으로 외친다. 그의 소리 없는 그 마음을 받아들
이기 위해 나는 지금껏 내 인생을 살아 왔다고 그의 마음에 존
경을 표하며 그 죽음을 기린다. 그에게 죽음을 주신 하느님을
찬양한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