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2 가객여운(佳客如雲)
어떤 여인
어느 날 불쑥 이상한 손님(?)이 날 찾아왔다.
새벽에 눈을 뜨자마자 웬 여인에게 내 마음이 자꾸 끌려가는데
세수를 해도 그 요상한 마음이 씻겨지질 않았다. 보통 일이 아니었
다!
아침기도 때도 기도서에 그녀의 얼굴만 보였으며 미사를 드리다
가도 자주 혼란에 빠지곤 했다. 그녀는 시도 때도 없이 내 감성의
문을 두드렸고, 나는 또 그 노크 소리 때문에 일을 제대로 할 수가
없었다. 이전에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었던 여자였다.
그녀는 정말 잘 모르는 여자였고 기껏해야 얼굴만 간신히 기억
하는, 사실은 이름도 모르는 여자였다. 그런데 뭔 일인지 그녀가
나를 붙들고 놓아 주질 않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약이었다. 한 며칠 지나자 이상하던 열기가 사라
지면서 눈에 삼삼하던 그 모습도 지워지게 되었다. 그동안 내가 뭔
주책이었나 싶어 혼자 부끄러워하다가도, 그 감정이 꼭 내가 원한
불순한 것만은 아니라고 자위를 했다. 그리고 한참 후의 일이었다.
한번은 용인에 있는 수녀원에 볼 일이 있어 호남고속도로를 승
합차로 달리는데 마침 주일 오후의 빗길이라 사고 차량이 많았다.
트럭이 뒤집혀 적재했던 채소가 도로를 메운 곳도 있었고 몇 중 추
돌 사고로 승용차들이 지그재그로 떠밀린 채 사람들이 서로 싸우
는 모습들도 있었다. 그리고 논산 부근이었다.
웬 승용차가 트럭을 뒤에서 받았는데 승용차 앞부분이 상당히
파괴된 채 찌그러져 있엇고 한 여인이 부상당한 남자를 안고 구급
차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 눈에 보였다. 바로 그때였다. 잊었던
망각의 저쪽 끄트머리에서 갑자기 한 사건이 번개처럼 튀어나오는
데 바로 그것이었다!
언젠가 꿈속에서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었다. 나는 이미 죽었다
고 판단했는데 어떤 여인이 부상당한 나를 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런데 나를 안았던 여자가 바로 '그녀' 였다! 시도 때도
없이 내 가슴을 온통 휘젓고 다녔던 여자가 그녀였다.
참으로 묘한 일이었다. 꿈에서 있었던 일이고 그리고 무슨 꿈을
꾸었는지조차 전혀 몰랐던 일인데 어째서 그 여인만이 홀로 내 머
리에 남아서 그토록 나를 흔들었을까. 나는 거기서 또 다른 어떤
사건의 이야기를 연결시켜 생각할 수가 있었다. 그것은들은 얘기
였다.
한 여학생이 자기 어머니를 아주 무서워했는데 그 증상이 보통
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어머니가 무섭게 대하는 것도 아닌데 딸은
계속 눈치를 보면서 어머니를 피했으며, 그리고 어머니의 모습만
봐도 깜짝깜짝 놀라는 것을 보고는 딸도 엄마도 여간 고통스러운
게 아니었다.
그런데 나중에 알려진 사실은, 어머니가 그 딸을 임신했을 때 아
이를 낙태시키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다는 것이다. 그걸 태아가 알
리도 없고 엄마도 오래된 일이라 까맣게 잊고 있었는데 그것이 아
이의 어떤 직감에서 튀어나와 어머니를 두려워했다는 것이다.
그런 걸 보면 세상 참 무서운 것이다! 뱃속의 태아가 모르는 것
같아도 다 알고 있으며 내 마음 내가 모른다 해도 누군가가 분명히
내 기억에 입력을 시켜 준 프로그램인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어떤 프로그램에 의하여 '인생' 이라는 컴퓨터를 작동시키고 있는
가.
요즘 여러 곳에 피정지도를 다니면서 느끼는 것이 있다. 성서의
내용을 가지고 관상을 시켜 보면 좀처럼 그 내용을 영상화시키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신자들뿐만 아니라 많은 신학생들과 수
녀님들도 마찬가지다. 왜냐하면 다른 쓸데없는 프로그램들이 너무
도 많이 그들의 머리에 입력되어 있기 때문이다.
나도 모르는 것에 내가 묶여 노예처럼 끌려 다닌다는 것은 참으
로 비참한 일이다. 그러나 사실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본인의 뜻
과는 상관없이 그렇게 인생이 끌려가고 있는지 모른다. 그런 걸 보
면 정말, 들린다고 아무것이나 다 들을 것도 아니며 또 보인다고
아무것이나 다 쳐다볼 것도 아니다.
세상을 좋게 만드는 것은 지식이나 권력보다는 결국 나 하나의
올바른 이미지인 것이다. 그러니까 삶이 어려울수록 좋은 말 서로
나누고, 좋은 생각 서로 간직하며, 그리고 좋은 행동을 애써 표현
해야 한다. 왜냐하면 내가 변하면 세상을 변화시킬 수 있기 때문이
다.
문득 내 가슴을 휘젓고 다녔던 꿈속의 '그녀' 가 생각난다. 나도
남의 꿈속에 들어가 좋은 일을 할 수는 없을까?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