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편하게 살기에는 너무 짧다
강길웅 신부의 소록에서 온 편지
3 어떤 꿈과 현실
심 할아버지
서생리에서 '심 할아버지'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분은 유명하다. 본래 '김병식' 이라는 어엿한 이름을 갖고 있지만
치료실 간호들과 주위의 사람들은 '심부름 할아버지', 또는 '심 할
아버지' 로 부르고 있다. 이유는, 심 할아버지는 당신이 할 수 있는
아주 간단한 일도, 그리고 별 자질구레한 잡다한 일도 당신이 안
하고 꼭 남을 시켜 먹기 때문이다.
오늘 오전에도 치료실에는 심 할아버지의 모습이 나타나지 않았
다. 보나마나 그 시간에는 당신 축사에서 돼지에게 밥을 주시거나
아니면 마늘밭에 가서 일을 하고 계실 것이 분명했다. 할 수 없이
김 간호는 오후에 치료 약품을 챙겨 심 할아버지의 집에 들르니 할
아버지는 이미 그렇게 될 줄 알고 딱 폼 잡고 기다리고 계셨다.
"날마다 힘든 일하시면서 치료를 소홀히 하시면 어떡해요!"
약간 짜증이 난 목소리로 심 할아버지를 쳐다보니 할아버지는
기다렸다는 듯이 오히려 다른 문제로 흥분하고 계셨다.
"응, 김 간호 왔어? 시상에 우리 아들놈한티서 편지가 왔당께. 요
것 조까 읽어 줘. 당최 눈이 침침해서 말이시 ---."
편지를 읽어 보니 부산에 살고 있는 아들 내외가 오는 목요일에
심 할아버지를 만나러 온다는 짤막한 내용이었다. 편지를 다 듣고
나시자 심 할아버지가 호들갑을 떠셨다.
"아이고, 이 일을 어쩐디야! 목요일이면 이틀밖에 남지 않았구먼.
김 간호! 나 쪼까 도와 줘!"
갑작스런 재촉에 김 간호는 난감해졌다. 다른 분들도 찾아 치료
를 해드려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해를 구했다.
"할아버지, 지금은 제가 좀 바쁘니까 내일 도와 드릴게요."
조심스레 약품을 챙겨 일어서려는데 심 할아버지는 김 간호에게
냅다 소리를 질렀다.
"나 김 간호 그렇게 안 봤는디, 이제 본께 영 못쓰것네! 학생 간호
때는 치료도 잘혀고 집안일도 잘 도와 주더니만 나가 늙었다고 괄
시하는감!"
그 말씀에 기가 팍 죽은 김 간호는 얼른 약품을 내려 놓고 팔을
걷어 부쳤다.
혼자 사는 할아버지의 방 안은 한 사람이 몸 누일 공간 정도만 비
어 있을 뿐 온갖 물건들, 옷, 밥상, 그릇, 통조림, 음료수병, 대추,
밤, 반찬그릇 등으로 잔뜩 널려 있었다. 김 간호는 흩어져 있는 옷
가지들을 모아 대충 빨아 널고 이부자리도 내다 말렸다. 그리고 다
시 방에 들어왔을 때 김 간호의 시선이 멈추게 되었다.
벽에는 가족 사진이 담긴 작은 액자가 먼지를 뒤집어쓴 채 걸려
있는데 어린애를 안은 부인과 젊은 남자가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아마 할아버지의 아들 내외인 것 같아 조심스럽게 내려 먼지를 턴
다는 것이 그만 액자를 떨어뜨려 유리가 산산조각이 나게 되었다.
그때 심 할아버지가 성난 얼굴로 쳐다보셨다.
"도와 주기 싫으면 말로 할 것이지, 남의 귀한 사진을 깨는 법이
어디 있당가! 다음부턴 일 안 시킬테니깐 어서 가 보드라고!"
퉁명스런 할아버지의 말을 뒤로 하고 나오는 김 간호의 마음은
참으로 착잡했다. '온갖 궂은 일은 이것저것 다 시켜 먹고 그까짓
유리 하나 깼다고 닦달을 해!' 간호도 성질이 났지만 그러나 하나
밖에 없는 액자를 산산조각을 냈으니 미안한 생각도 들었다.
액자 일로 고민하던 김 간호는 육지에 나가 새 액자를 하나 구한
뒤에 심 할아버지를 찾아가다가 마침 옆집에 사는 할머니를 만나
게 되었는데 그때 할머니가 걱정스런 얼굴로 김 간호를 가로막았다.
"김 간호! 심 할배 찾아왔는감?"
간호가 고개를 끄덕이자 할머니가 다음 말을 이었다.
"그 영감, 맴이 안 좋을 것인디 ---."
김 간호는 지레 겁이 나서 얼른 대답했다.
"저 때문에 화가 나셨나봐요?"
그러자 할머니가 고개를 저으면서 대답했다.
"김 간호 땜시 그렁게 아니고, 어저께 부산에서 산다는 아들네가
왔는디 절만 한 자리하고 나서 그 영감 돈이랑 저금통장이랑 챙겨
냉큼 가버렸디야, 글쎄!"
할머니 말씀을 듣고 보니 김 간호의 맘이 더 우울해졌다. 그때 심
할아버지는 텃밭에서 잡초를 뽑고 계셨다. 간호가 다가가면서 인
사를 했다.
"할아버지, 저번 일은 정말 죄송해요. 용서해 주세요."
김 간호는 진심으로 할아버지께 사과를 했다. 그러자 심 할아버
지가 대답하셨다.
"아니여! 아들놈이 온다니께 나가 정신이 없어서 김 간호한티 괜
한 역정을 냈는 갑서. 김 간호가 맴 풀어!"
심 할아버지의 말씀을 듣고 나니 간호의 맘이 한결 편안해졌다.
바로 그때 할아버지는 다른 주문을 또 하셨다.
"아차, 그건 그렇고 나가 지금 마늘밭에 좀 가봐야 쓰것는디 요
것 좀 해줘. 이 옷하고 양말 몇 짝만 꼬매 줘. 알았제? 내일까지여!"
몽당발로 찌웃등거리며 밭으로 사라지는 심 할아버지를 보고 김
간호는 갑자기 볼멘 소리를 했다.
"심 할아버지는 다른 간호들은 다 놔 두고 꼭 나만 부려먹더라!"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