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행복한 삶 - 7.15,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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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7-15 | 조회수376 | 추천수7 | 반대(0) 신고 |
2012.7.15 연중 제15주일(농민주일) 아모7,12-15 에페1,3-14 마르6,7-13
행복하게 살라고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요 권리입니다.
바로 행복을, 자유를, 사랑을 찾는 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어느 유명인사들 간의 인터뷰 중 다음 문답이 신선했습니다.
30대 후반 부터는 늘 행복한 일이 오늘, 오늘, 오늘로 갱신되어 온 것 같아요.”
관성은 참 무섭습니다. 오늘 행복하게 사는 사람이 내일도 행복하게 살고, 오늘 감사하는 사람이 내일도 감사하며 삽니다. 오늘 불행하게 사는 사람은 내일도 불행하게 살고, 오늘 불평하며 사는 사람은 내일도 불평하며 삽니다.
문재인 대선 후보에게 던졌다는 말도 저에겐 화두였습니다.
즉각적으로 확신에 넘쳐 대답할 수 있다면 그는 분명 행복한 사람입니다.
베텔의 사제 아마츠야에 대한 아모스의 대답이 통쾌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19세기 말 이집트 나일강 서쪽 옥시린쿠스의 쓰레기더미에서 기원 후 300년경 한 인물이 신에게 묻는 질문들을 적어 신전에 바친 질문서가 나왔다는데, 그 중 마지막 12번 째 질문이 의미심장했습니다.
시공을 초월하여 삶의 밑바닥에서 인간이 만나게 되는 질문입니다.
나 자신으로 사는 것이요 나 자신으로 살 때에야 비로소 참 행복입니다.
우리는 우연한 존재가 아니라 하느님께 불림 받은 존재입니다. 하느님께 불림 받았다는 자각이 나 자신으로 살 수 있게 합니다.
우리가 잊고 있는 축복을 상기시킵니다.
에페소서 찬가, 초대 에페소서 교회 신도들이 함께 불렀던 찬가임이 분명합니다.
그야말로 숨을 멈추지 않고 하느님께서 베푸신 은총을 감격에 벅차 내리 노래했던 것입니다.
주어는 모두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또 사랑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삼으시기로 미리 정하셨습니다. 또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았습니다. 이는 하느님의 그 풍성한 은총에 따라 이루어진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은총을 넘치도록 베푸셨습니다. 당신의 지혜와 통찰력을 다하시어, 그리스도 안에서 미리 세우신 당신 선의에 따라 우리에게 당신 뜻의 신비를 알려 주셨습니다.
이를 깨달아 알 때 누구나 행복하고 부요하고 자유로운 삶입니다.
미사 안에 이 모든 축복이 들어있습니다.
넘치는 축복을 받았으면서도 이를 몰라 부자면서도 가난하고 불쌍하게 거지처럼 사는 사람들입니다.
축복덩어리인 우리들임을 깨닫습니다.
하여 우리 수도승들은 밥 먹듯이, 숨 쉬듯이 매일 평생 끊임없이 찬양과 감사의 성무일도를 바칩니다.
하느님의 일인 찬양과 감사의 성무일도보다 앞세우지 말라 하셨습니다.
오늘 에페소서 역시 찬미로 시작하여 찬양으로 끝납니다.
이 성령께서 우리가 받을 상속의 보증이 되어 주시어, 하느님의 영광을 찬양하게 하십니다.”
의미 충만한 존재의 삶을 살게 합니다. 긍정적 낙관적 인생관을 지니게 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찬양과 감사의 삶이 없어 온갖 정신 질환에 방황이요 혼란이요 무절제, 무기력, 무감동의 삶입니다. 도대체 찬양과 감사의 기쁨이 없다면 무슨 기쁨, 무슨 맛으로 이 광야인생 살아갑니까?
함께 바치는 공동찬양, 감사 기도가 제일입니다.
찬양과 감사기도가 마음의 눈을 열어줘 우리가 받고 있는 축복이 얼마나 큰지 깨닫게 하고 더욱 찬양과 감사의 삶에 전념케 합니다.
주님은 또 우리에게 맞갖은 축복을 내려 주시니 바로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기도 합니다.
혼자 누리라는 축복이 아니라 찬양과 더불어 이웃과 나누라 주어지는 축복입니다.
당신 사람들을 모조리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주님은 유다 출신 아모스를 북 이스라엘에 파견하셨고, 복음의 주님은 열 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둘 씩 짝지어 세상에 파견하십니다.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하느님 축복으로 내적 부자이기에 이런 무소유의, 무공해의 삶이 가능합니다.
텅 빈 충만의 내적풍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제자들의 회개의 선포와 더불어 마귀는 쫓겨나고 병자들은 치유되니 제자들을 통해 주님께서 하시는 일입니다.
이젠 외적성장이 아니라 내적성장과 성숙으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한 없이 망가진 인간이요 자연이 아닙니까.
환대와 우애의 공동체를 형성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겐 비전이자 희망임을 깨닫습니다.
외적성장에서 내적성장으로 문명의 전환기에 처한 작금의 현실입니다.
복음의 제자들처럼 내적 풍요를 상징하는 가난하고 단순한 삶 자체가 최고의 복음 선포임을 깨닫습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우리의 의무이자 권리입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합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살아야 내일도 행복을 삽니다.
지금 여기서 행복을 못 살면 내일도 못 삽니다. 행복은, 축복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발견입니다.
마음의 눈만 열리면 곳곳에 널려 있는 행복이요 축복입니다. 여기서 저절로 끊임없이 솟아나는 찬양과 감사요 복음 선포의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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