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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슬픈 전쟁, 참혹한 피난길
작성자강헌모 쪽지 캡슐 작성일2012-08-03 조회수530 추천수1 반대(0) 신고
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모성애는 세상에서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는 모든 행위 가운데 가장 가치 있는 것임을 우리는 잘 안다. 어머니의 사랑은 무조건적인 본능 그 자체다. 그래서 그 사랑을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말한다.
가난한 사람들의 하늘 가정의 기둥은 어머니다. 어머니가 큰 기둥처럼 버티고 있는 한 집은 무너지지 않는다. 세상의 모든 어머니는 가정의 수호천사라는 사실을 나는 믿고 있다. 슬픈 전쟁, 참혹한 피난길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동족상잔의 비극, 한국전쟁이 터진 해에 나는 세 살이었다. 전쟁이 나자 어머니의 품안은 나의 방 공호였고, 어머니의 등은 내가 탄 피난 마차나 다름없었다. 그 어려 운 시기에 나는 체구가 작은 어머니에게 큰 짐이 되었던 것을 생각 하면 지금도 죄스러운 생각이 든다. 어머니는 나 때문에 제대로 잡숫지도 못했을 것이고, 떡 한 조각 이라도 날 먹이려고 굶었을 것이며, 폭격을 보면 나를 업고 뛰었고, 총소리가 나면 나를 엄호하느라 얼마나 노심초사하셨을까. 다시 생각해 보아도 나는 그 시기에 큰 불효자였음에 틀림없다. 전쟁 통에 피난길에서 인파에 휩쓸리면 가족들과 헤어져 이산가 족이 되고, 그래서 전쟁고아들이 생겨났고, 먹을 것이 없어서 굶어 죽는 아이들이 천지에 널렸으며, 심지어 아이가 짐이 되어 냉정하 게 버리고 떠난 부모들도 있었다고 들었다. 그런데 어머니는 세 살배기인 나를 끝까지 놓지 않고 먹이고 입 히고 씻기고 재우고 그렇게 살려내어 끝내는 신부를 만들었으니, 아무것도 모르고 거저 큰 줄 알면 그런 불효가 어디 있겠는가. 나와 동시대에 태어난 사람들은 그런 의미에서 '어머니의 은혜' 라는 노래를 천 번은 더 불러야 하고 다른 형제보다 천 배 더 효도 해야 한다는 생각이다. 그 전쟁 통에 어머니가 부르면 냉큼 뛰어오 고 숨으라면 재빨리 뛰어가 숨을 수 있었던 누님과 형님들보다 내 가 어머니를 더 힘들게 하면서 큰 은혜를 입었다는 것은 그 점뿐만 이 아니다. 이 세상 모든 막내들은 다른 형제보다 가장 늦게 태어났 다는 이유로 어리광과 응석을 더 많이 가장 늦게까지 부린다. 어머니에게 막내는 다 커도 여전히 막내일 뿐이다. 그럼에도 모 든 막내들은 커서도 어머니에게 큰소리 떵떵 치고 더 말을 안 듣고 어머니 속을 썩여드리는 경우가 많지 않은가. 아무리 속을 썩이고 말을 안 들어도 모든 어머니들은 그런 막내를 계속 두둔하고 품어 주고 사랑한다. "엄마는 왜 막내만 싸고돌고 꼼짝 못하세요?" 다른 형제들의 항의를 받으면서도 어머니의 막내에 대한 사랑은 외눈박이 사랑이었다. 모든 어머니들은 연로한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도 다른 형제들 보다 막내 걱정이 되어 눈을 감을 수 없다고 한다. 그처럼 어머니의 막내에 대한 사랑은 일방통행이다. 어쩌면 내가 막내를 낳아 보지 않는 한 모든 어머니들의 막내에 대한 사랑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 다. 그리고 왜 나는 유독 어머니의 눈물이 될 수밖에 없었는지, 아 마도 영원히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집이 어머니의 고향 누산리에서 아버지의 본가 흥신리로 이 사한 지 채 일 년이 못 되어 전쟁이 터졌고, 나라는 온통 전쟁의 비 극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오래 전부터 38선 부근에서 소규모 총격 전이 자주 발생했지만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분위기가 계속 되고 있던 중, 마침내 북한군이 남침을 개시했다는 소식과 함께 국 군 장병들은 원대 복귀하라는 공지가 뉴스에서 반복되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 공산군은 군사분계선이던 38선 전역 을 불법 남침하면서 파죽지세로 공격을 개시하여 3일 만에 서울을 점령했다는 소식이 들렸다. 우리 흥신리는 서울보다 북쪽에 있고, 임진강에서 불과 10킬로미 터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서울이 함락되었다면 서울보다 위쪽에 있는 우리는 이미 적의 수중에 떨어졌다는 뜻도 되었다. 이미 밤사이에 포화소리가 계속 들리면서 대통령이 서울을 빠져 나갔고, 한강다리 도 폭파당했으며, 거리는 피난민들로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는 소 식도 전해졌다. 흥신리 사람들도 서둘러 피난 보따리를 싸기 시작했다. 그리고 소 와 말에 짐을 싣고 아이들을 앞세워 피난길을 재촉하는 사람들이 늘 어갔다. "댁은 피난 안 가시오?" 마을 사람들이 피난길을 떠나면서 꼼짝도 않고 있는 우리 집에 한 마디씩 했다. 어머니는 불안한 마음에 아버지에게 물었다. "여보, 우리도 떠나야 하는 거 아니에요?" 그러자 아버지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 무서운 왜정 때도 피난 안 가고 모두들 버티고 살았는데, 이제 여길 떠나서 어딜 가겠소. 벌써 서울이 함락 되었다면 피난을 가기 에는 너무 늦은 것 같소." 아버지는 그때 이렇게 생각하셨다고 한다. 누산리에 살다가 흥신 리로 돌아온 지 일 년도 안 되었는데 겨우 찾아온 고향을 다시 떠날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는 것이다. 다시 고향을 떠나서는 안 되는 일 이었다. 마을 사람 모두 피난을 떠나도 아버지는 당시 상황을 그저 낙관적으로만 보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던 것 같다. 하지만 날이 갈수록 마을의 집들이 하나씩 비어 가고, 우리 흥신 리보다 더 북쪽에서 내려온 피난 행렬이 계속 이어지고 있었다. 게 다가 북한군의 잔인한 횡포도 우리를 바짝 긴장시켰다. 그러자 현실 을 애써 외면해 오던 아버지도 결국 큰 아버지와 의논을 하더니 마 음을 바꾸고 말았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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