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가톨릭 사제가 쓴 눈물의 사모곡
나물할머니의 외눈박이 사랑
이찬우 신부
처음에 어머니는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편지를 쓰셨는데,
남에게 대필시키는 것이 쉽지 않아서 독학으로 글을 익혀 편지를 쓰셨다.
그래서 어머니의 편지 한 구절 한 구절은 너무 소중하고 고마웠다.
사제의 어머니
하느님, 감사합니다. 하느님께서 정말 우리 찬우를 사제로
만들어 주신다면 그보다 더 큰 은총이 어디 있겠습니까.
첫사랑의 눈물을 머금고
가톨릭 사제는 평생 독신으로 순명의 삶을 살아야 한
다. 이렇게 말하면 그저 한 줄의 문장이지만, 그것이 말처럼 쉬운 일
은 아니다. 자신의 인생을 하느님께 온전히 내어 바친다는 생각으로
그에 합당한 삶을 '행동' 으로 보여 주며 살아야 하는 것이다.
그저 나를 하느님께 봉헌하겠다는 마음만으로는 안 되는 일이기
에, 신학생들은 군대까지 합치면 10년 가까운 신학교 생활을 통
해 진정으로 사제의 길을 원하는가, 그리고 원한다면 극복할 수 있
는가를 스스로 판단하고 또 판단받아야 한다.
신학교에서의 공동생활은 매일 미사와 기도, 묵상, 양심성찰, 성
체조배와 교과공부로 꽉 차 있다. 휴대전화는 당연히 가질 수 없고,
유선전화 사용, 텔레비전 시청, 인터넷 접속, 외출도 엄격히 제한된
다. 그런 훈련 과정 속에서 사제의 길을 포기하는 신학생이 3분의 1
이나 된다.
나는 신앙이 깊은 집에서 태어나 소신학교 시절부터 한순간도 사
제의 길이 나의 길임을 의심하지 않았지만, 나에게도 성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던 순간이 있었다. 군대에서 제대하고 돌아와 대학
원 1학년 때였다. 마침 성소주일을 맞이하여 가족들이 신학교를 방
문했다.
5월 초에 있는 성소주일은 마치 일반 대학의 축제와 같은 행사가
벌어지는데, 일 년에 한 번 신학교와 신학원(기숙사)을 개방한다. 그
날은 방문객들이 신학생 기숙사를 구경할 수 있다. 그래서 어머니와
가족들이 오셨다. 나는 그날 나를 찾아온 여자 친구를 어머니에게
소개했다. 그녀는 E대학교 4학년이었는데, 성소를 흔들 만큼 깊은
관계는 아니었지만 꽤 친하게 지내는 사이였기에 나를 만나러 온 것
이다. 어머니는 내가 여자 친구를 소개하자 약간 당황한 기색을 보
이긴 했지만 별다른 말씀은 하지 않으셨다. 그저 아는 여학생이거니
생각하고 크게 신경을 쓰시지 않는 것 같아 보였다.
그런데 여름방학 때 집에 갔더니 어머니는 신학교 축제 때 인사시
킨 그 여학생이 누구냐고 물으셨다. 나는 그냥 친구라고만 말씀드렸
다. 하지만 당시는 요즘처럼 남녀 관계에서 친구라는 개념이 없던
때였다. 그래서 친구라는 말은 곧 연인 관계로 오해하던 시대였다.
어머니는 나를 약간 의아한 눈초리로 바라보셨다.
1974년 여름방학이 끝나고 개학을 했지만, 그 시기가 바로 대학
가에서는 유신헌법 철폐를 외치며 반정부 데모가 극심하던 때였다.
그 무렵 나는 신학원 학생장 직책을 맡고 있었다. 물론 신학교에서
도 유신헌법 철폐 반정부 데모에 가담했고, 그 여파로 10월 말에 일
주일간 휴교 처분을 받았다.
학교 문이 닫히자 신학생들도 모두 학교를 떠나야 했다. 나는 당
시 학생장이라는 직책을 가진 책임자였으므로 휴교 중인 일주일 동
안 도피를 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었다. 그래서 배낭 하나만 달랑 메
고 서울을 떠났다. 그곳이 동학사와 부여의 갑사였다.
그때 여자 친구도 마침 학교가 휴교 상태였기 때문에 나를 위로하
기 위해 찾아왔는데, 우리는 그곳에서 3일 동안 많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 다음 일주일 후 학교가 정상화되어 다시 신학원으로 돌
아간 나는 마음을 잡을 수가 없었다. 휴교 기간 동안 그녀와의 만남
이 긴 여운으로 남아 있었고, 그녀 역시 내게 적극적으로 접근해 왔
기 때문에 나 역시 흔들리고 있었다. 당시 나는 한 달 후에 부제품을
받아야 할 상황이었다.
나는 철학과 2학년을 마칠 즈음 군대 가기 전에 성소에 대한 갈등
이 있었지만 군 생활 중에 말끔히 해소하고 복학을 했는데 다시 깊
은 시련에 부딪쳤다. 나에게 과연 사제의 길이 아닌 다른 길이 있는
것일까. 아니다. 나는 지금까지 성소를 지키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열심히 달려왔다.
그렇게 결단을 내린 후에는 더욱 더 그녀에 대한 깊은 연민의 감
정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그처럼 성소를 몇 번이나 단념했고, 또 그
녀를 몇 번이나 단념하는 좌충우돌이 일주일 동안에도 여러 번 계속
되었다. 어떤 날은 하루에도 결심이 뒤바뀐 적도 있었다. 그러나 결
과적으로 하느님은 나에게 큰 힘과 용기를 주셨다. 한 생애를 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이것이냐 저것이냐를 놓고 선택과 결단의 갈림
길에 서 있는 경우가 비단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마침내 나는 마음을 비우고 내가 처음 성소를 선택한 초심으로 돌
아가 하느님 앞에 엎드렸다. 그것은 어쩌면 내가 부제품을 받기 전
에 겪어야 했던 마지막 시련이 아니었나 싶다. 지금도 내가 결단을
내렸을 때 그녀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다.
"한 여자를 사랑하지도 못하면서 어떻게 세상 사람들을 모두 사랑
할 수 있어요?"
그녀는 나에게 이 말을 남기고 떠났지만, 내 답변을 기다리면서
이미 내가 정해 놓은 길을 더 이상 막을 수 없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
을 것이다. 결국 그해 12월 8일, 나는 인천 답동성당에서 부제품을
받았다. 그날 부제품을 받으면서 "너희가 나를 선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선택하여 내세운 것이라"(요한 15,16)는 하느님의 말씀
을 다시 확인할 수 있었다. 정말 내가 하느님을 택한 것이 아니라 하
느님께서 나를 택하셨다는 것을.
그녀는 내가 부제품을 받는 날 꽃다발을 들고 와서 축하해 주었다.
그녀는 나의 하느님에 대한 사랑과 선택을 확실히 인정해 주었다.
내가 갈림길에 빠져 있을 때는 학기 중이어서 어머니에게 특별히 말
씀드리지 않았지만, 나는 그런 문제로 어머니에게 걱정을 끼쳐 드
리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혹시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았더라도 아
들의 성소를 지켜 달라고 하느님께 묵묵히 기도만 바쳤을 것이다.
지금 그때를 돌이켜보면 그런 위기가 있었기에 내가 사제의 길을
얼마나 열망하고 있었으며, 하느님에 대한 나의 정결이 얼마나 확실
했는가를 깨닫게 된 기회가 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것은 또한 성
녀 데레사의 말처럼, 정결이란 단순히 결혼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내가 하느님을 떼려야 뗄 수 없는 사랑으로 깊
이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뜻도 되었다.
주님의 평화가 항시 함께 하기를......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