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네 자신도 죄인임을 알라. >
얼마 전에 운전을 하다가 어떤 아주머니에게 욕을 먹었습니다. 사실 저는 크게 잘못한 것이 없습니다. 제가 1차선에서 달리다가 속도를 좀 줄이기 위해 2차선으로 아무런 차도 없는 것을 확인하고 깜박이를 넣고 천천히 차선을 바꾸었는데 제 뒤에서도 3차선에서 빠르게 돌진해 오던 아주머니가 앞 차를 추월하기 위해 자신도 2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한 것입니다. 그러나 제가 차선을 변경하는 것을 보지 못해서 제 차 뒤에 막혀서 브레이크를 밟아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크게 크락션을 울리고는 1차선으로 들어와 창문을 내리고 “도대체 운전을 어떻게 하는 거예요?”하며 쏘아붙였습니다. 정말 사나와 보였습니다.
오히려 전방주시 태만으로 제 차 뒤를 박을 번 한 것이 자신인데도 무조건 화를 내는 것이었습니다. 길 위에서 자세히 설명을 드릴 수도 없고, ‘혹시 내가 잘못했나?’하며 머뭇거리고 있는데, 그 분은 창문을 다시 올리고 제 갈 길을 가 버렸습니다. 황당하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였습니다.
이상하게 이웃이 나에게 잘못하는 것은 잘도 보이는데 내가 잘못하는 것들은 잘 보지 못합니다. 아담과 하와가 죄를 짓고 자신들이 잘못한 것들보다는 상대가 잘못한 것을 더 크게 보고 그 상대의 탓을 하게 된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이태리에서 운전할 때 저도 그랬던 적이 있었습니다. 이태리 사람들은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다혈질이어서 무조건 남의 탓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 번은 제 차선으로 열심히 가고 있는데 한 차가 옆에 붙더니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막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자기 앞에 고장 난 차가 있어서 제 앞으로 끼어들려 했는데 제가 양보를 안 해 주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차 앞에 고장 난 차가 있는 것도 몰랐고 제 앞으로 끼어들려고 하는 줄도 몰랐습니다. 그냥 제 차선으로만 간 것인데, 양보를 안 해 주었다고 욕을 먹은 것입니다. 그 차선을 탔던 것은 자신의 탓인데도, 다른 차선으로 주행하는 사람이 자기에게 양보를 해 주지 않았다고 쫓아와서 그렇게 소리를 질러대는 것입니다.
그 이후로는 저도 이태리 사람들에게는 조금 사나와졌습니다. 젊은 여자가 모는 차와 접촉사고가 있을 뻔 했는데, 먼저 여자가 시비를 걸기에, 저도 마구 쏘아붙였습니다. 제가 차에서 내리려는 시늉을 하자 여자는 겁을 집어먹고는 도망쳐버렸습니다.
그런데 다음에 그 길에 다시 가보니 제가 조금 더 잘못한 것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자가 얼마나 억울했을까?’하면서 고해성사도 보았습니다.
그 때의 일이 기억이 나니 좀 전에 나에게 쏘아붙인 아주머니도 그 이전에 남자들에게 많은 욕을 먹었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 분풀이가 나에게 오는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이태리에서 저도 그랬던 적이 있음을 생각하니 화가 가라앉았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베드로는 하루에 일곱 번만 용서해 주면 되느냐고 예수님께 질문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인간이 있었던 것 같은데, 우리는 그 사람이 가리옷 유다라고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네 자신을 알아라. 너도 죄인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시기 위해서 예화를 하나 들려주십니다.
일만 탈렌트를 탕감 받은 사람이 백 데나리온 빚진 친구를 감옥에 가두었다는 내용입니다. 일만 탈렌트는 우리나라 돈으로 따지면 수조원에 해당합니다. 우리가 갚을 수 있는 액수가 아닙니다. 이는 그리스도의 ‘피’값입니다. 그 분의 피로 우리로서는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죄가 용서받기 때문입니다. 백 데나리온은 수백만 원 정도이고 이는 인간끼리 잘못할 수 있는 액수입니다. 따라서 하느님께 죄를 용서받는 사람이 이웃의 죄를 용서하지 못하면 하느님께서 다시 그 사람의 죄의 용서를 철회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을 용서하니까 우리 죄를 용서해 주시는 것입니다. 먼저 내가 하느님께 죄의 용서를 받는 죄인임을 깨달아야 이웃도 용서할 수 있게 된다는 내용입니다.
한 신부님이 저에게 이런 고해성사를 보았습니다. 고해의 비밀이긴 하지만 저에게 고해를 한 사제가 누군지 모를 것이고, 또 큰 잘못이 아니며, 사제들은 어떤 고해를 하는지 궁금해 하실 수도 있으니 말씀 드리는 것입니다.
저도 복사를 서 보았기 때문에 아이들이 복사서는 모습을 보면 참 귀엽습니다. 틀리지 않기 위해서 식은땀까지 흘리는 아이들은 실수를 하더라도 예뻐 보입니다. 그러나 개중에는 장난으로 성의 없이 복사를 서는 아이들도 가끔은 있습니다. 그러면 사제들은 미사전례에 집중이 되지 않기 때문에 화가 날 때도 있습니다.
그 신부님이 미사를 하는데 그 날도 한 말썽꾸러기 녀석이 복사를 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성체를 올렸는데도 종을 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신부님은 가뜩이나 그 아이 때문에 미사 때마다 분심이 들었는데 그 때는 정말 화가 났다고 합니다. 그래서 자신도 성체를 바라보지 않고 복사서는 아이를 노려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미사를 드리는데 아이가 잘못한 것보다 신자들이 보라고 거양성체를 하면서 정작 자신은 아이를 노려본 것이 큰 후회가 되었다고 합니다. 자신의 잘못을 깨달으니 미사 끝날 때쯤엔 아이에 대한 원망이 많이 누그러졌다고 하였습니다. 용서의 시작은 바로 이것을 아는 것입니다.
‘나도 잘못하는데!’
소크라테스는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을 했습니다. ‘네 자신이 아무 것도 모르고 있음을 깨달으라.’는 뜻입니다. 오늘 예수님도 우리 자신도 똑 같은 죄인임을 알라고 하십니다. 우리들도 우리 자신이 같은 잘못을 범하고 있는 죄인들임을 인식하여 용서 못하는 사람이 절대로 없도록 해야겠습니다.
요셉 신부님 미니홈피: http://minihp.cyworld.com/30josep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