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사람으로 산다는 것은 - 8.26,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
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8-26 | 조회수381 | 추천수6 | 반대(0) 신고 |
2012.8.26 연중 제21주일
여호24,1-2ㄱ.15-17.18ㄴㄷ 에페5,21-32 요한6,60-69
깜짝 놀란 나머지 걸레로 닦아내고 몰아냈습니다만 궁금증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좀 잠잠한듯하더니 어제부터 오늘 아침까지 무수한 개미들의 행렬이 줄을 잇고 있었습니다.
개미들이 미리 알아챘구나.”
하는 생각이었습니다.
개미는 미리 장마를 감지하여 피난길에 오른다는 어느 독자의 댓글이 있었습니다. 미물인 개미가 폭풍우를 내다보는 감각이 신기합니다.
하느님의 도래를 감지하는 우리의 영적감각의 상태는 어떤지 생각하게 합니다.
베네딕도 16세 교황의 저서 중 다음 대목에서 착안했습니다.
그럼으로써 비로소 위대한 행복의 문이 열린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아야 합니다. 사람으로 사는 것은 오르기 힘든 산을 타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런 굽이를 거쳐야만 비로소 정상에 오르고 그래야만 존재의 아름다움을 경험해볼 수 있는 법입니다. 이를 강조하는 일이 바로 저의 관심사입니다.”
온갖 시련 중에 겸손으로 깊어지는 여정이 내적으로는 하느님의 산 높이에 오르는 여정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의 등정 목표라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하나하나가 하느님의 산 호렙입니다.
바로 사람들이 산을 좋아하여 산을 타는 이유는 바로 이런 하느님을 찾는 내적갈망의 표현입니다.
이제 내적으로 ‘나’라는 하느님 산타기에 오릅니다.
산 아래에서 이리저리 떠돌며 시간 보내지는 않았는지요.
사람처럼 산마다 크기, 높이, 모양은 다 다릅니다.
하나하나 크기, 높이, 모양은 다 다른 하느님의 산들입니다.
내 하느님의 산꼭대기에 이르러 하느님을 만납니다. 마치 하느님의 산 호렙 정상에서 하느님을 만난 엘리야처럼 말입니다.
‘나’라는 하느님의 산을 잘 탐구하여 등정에 올라야 합니다.
1독서의 여호수아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를 스켐으로 모이게 한 후 하느님 목표를 새롭게 환기시킵니다.
이방의 우상들에 빠져 하느님의 산 등정 길에서 좌초하는 것보다 큰 불행은 없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에 말에 화답하여 기꺼이 하느님의 산 등정 길에 오를 것을 약속합니다.
종살이하던 집에서 데리고 올라오셨으며, 우리 눈앞에서 또 우리가 지나온 그 모든 민족들 사이에서 우리를 지켜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주님을 섬기겠습니다. 그분만이 우리의 하느님이십니다.”
우리가 지나온 모든 길에서 우리를 지켜주셨고 계속 하느님의 산 등정 길의 가이드가 되어 주십니다.
새롭게 하느님 목표를 확인하며 영육을 충전시킨 이스라엘 사람들처럼 우리 역시 하느님의 산 등정 여정 중 주님의 미사모임 안에서 잠시 쉬면서 영육을 하느님의 영과 생명으로 충전시킵니다.
모세의 죽음처럼 장엄합니다.
그의 나이 백 십 세였다.”
‘나’라는 하느님의 산 정상에 도달한 후 복된 죽음을 맞이한 이들 몇이나 될까요.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인간관계’를 맺으며 살아가는 것을 뜻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부단히 정화되고 성화되면서 참되고 올바른 관계입니다. 사람이라고 다 사람이 아니라
‘묻지 마 살인’등 곳곳에서 출현하고 있는 인간괴물들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는 바오로 사도의 단골용어입니다.
영원히 해결되지 않는 문제입니다. 부부가 함께 한 몸으로 하느님의 산 정상에 오르는 경우 말 그대로 하늘의 별따기 만큼이나 어렵지만 고맙게도 바오로 사도가 그 비결을 보여줍니다.
아내도 모든 일에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남 편 여러분,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그리스도와 교회의 관계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상호 순종과 사랑을 명하시는 주님이십니다.
비로소 부부는 한 몸이 되어 하느님의 산 정상에 도달합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완성은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와 함께 이루어집니다.
여기 남자수도자들이 함께 살 수 있는 기적도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를 통해 새롭게 맺어진 인간관계 때문에 가능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용서하신 것처럼 또 서로 용서하기에 가능한 새로운 인간관계요 공동생활입니다.
말씀을 먹어야 사는 영적존재인 사람들입니다.
온통 ‘돈과 밥’의 육적인 것이 전부가 되어가는 오늘의 현실입니다.
말씀을 듣기가 거북하다며 투덜댑니다. 이들의 기대에는 아랑곳없이 주님은 참으로 중요한 말씀을 주십니다.
육은 쓸모가 없다.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영이요 생명이다.”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이었을 것입니다.
주님의 우레 같은 말씀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우리를 하느님과 소통할 수 있는 영적존재로 만들고, 하느님과의 소통으로 충만한 생명의 존재로 만듭니다.
하느님 말씀에 굶주리고 하느님 말씀에 목말라 겪는 우리의 시련입니다.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맛보고 깨달아갈수록 세상맛들로부터 점차 해독되어 자유로워집니다.
씹고 씹으며 묵상할수록 깊어지는 말씀 맛, 하느님 맛입니다.
열두 제자들은 주님이 얼마나 좋으신지 알았습니다. 진정 찾아야 할 분은, 올라가야 할 하느님의 산은 주님뿐임을 알았습니다.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는 주님의 말씀과 성체를 찾아 이 은혜로운 미사에 참석한 우리들입니다.
당신 미사잔치에 초대해 주시어 당신 안에서 관계를 새롭게 하시고 당신 영과 생명으로 충만케 하십니다.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