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공동체의 기적 - 9.21,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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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09-21 | 조회수374 | 추천수8 | 반대(0) 신고 |
2012.9.21 금요일 성 마태오 사도 복음사가 축일
에페4,1-7.11-13 마태9,9-13
힘들지만 공동체 생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공동체를 떠나 선 개인의 성장이나 성숙도 참 나의 실현도 불가능합니다. 도저히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공동체의 위력을 실감했고 감사하는 마음 가득합니다. 어제 수도원 정원의 가설무대를 치우는 모습을 보면서도 공동체의 힘을 다시 실감했습니다.
한 둘이선 도저히 치울 수 없는 큰 나무판 무대를 여덟 수도형제들이 양 편 네 명씩 나눠 들어 트랙터에 싣고 있었습니다. 아무리 천하장사라도 혼자서 그 큰 나무무대를 들어 올릴 수는 없습니다.
작고 약해도 적당한 자리에 분산되어 힘을 안배하니 너끈히 옮겨 실을 수 있었습니다.
‘아, 이게 공동체의 기적이구나.’ 실감했습니다. 사실 매일 쓰는 제 강론도 공동체로부터 부단히 영감과 활력을 받지 못한다면 벌써 도중하차 했을 것입니다.
공동체내에서 실현되는 구원입니다. 예수님이 하늘나라 선포에 이어 착수하신 것도 하늘나라 공동체의 형성이었고, 당신 공동체로의 부르심으로부터 당신 소명을 수행하셨습니다.
당신 제자공동체에 합류시킵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벌떡 일어나 주님을 따라 나서 주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합니다.
예수님 중심의 수평적 평등한 형제들의 공동체였습니다.
예수님 중심으로 온갖 불평등이 철폐된 화기애애한 장면입니다. 즉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선 바리사이들입니다. 사실 이들의 정서로는 너무나 불편한 식탁 장면이었을 것입니다.
공동체의 일치에 도움이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하여 가정공동체의 성원들은 식구(食口)라 하지 않습니까? 함께 먹어 공동체입니다.
사실 깊이 들여다보면 병들지 않은 사람, 죄 없는 사람 몇이나 될까요. 정도의 차이일 뿐 모두가 병자요 죄인인 우리들입니다. 이를 깨달아야 겸손이요 연민의 자비입니다.
너희는 가서 ‘내가 바라는 것은 희생 제물이 아니라 자비다.’하신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배워라, 사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우리의 목자이자 의사이신 주님이심을 깨닫습니다.
주님은 제사 자체를 원칙적으로 무시하지 않습니다. 다만 다른 이들에게 자비를 베풀어야 한다는 근본 계명을 소홀히 할 정도로 전통적 종교 의식에만 매달리는 자세를 단죄할 뿐입니다.
더할 나위 없는 이상적 현실입니다.
식당에서의 공동식사와 더불어 성당에서의 공동전례는 양대 필수요소라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시작하신 공동체 운동에 바오로 사도가 견고하고 풍부한 신학적 기반을 제공합니다. 통일성과 다양성이 일치를 이룬 공동체가 우리의 이상이자 현실입니다.
전반부는 하느님 안에 있는 믿는 이들의 통일성을 보여주며 후반부는 은사의 다양성을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이고 성령도 한 분이십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고 믿음도 하나이며 세례도 하나이고, 만물의 아버지이신 하느님도 한 분이십니다. 그분은 만물 위에, 만물을 통하여, 만물 안에 계십니다.”
하나와 통일성을 이루며 각자 받은 은사의 다양성을 발휘하며 살아가는 공동체의 형제들입니다.
바로 살아계신 하느님 체험입니다.
통일성의 체험도 다양성의 체험도 불가능합니다.
우리 모두에게 공동체내에서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구체적 수행지침을 가르쳐줍니다.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 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하십시오.”
우리 또한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어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도달하게 됩니다.
매일의 이 거룩한 미사은총이 이를 촉진시켜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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