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 생명의 길 - 10.28. 일,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신부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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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김명준 | 작성일2012-10-28 | 조회수363 | 추천수9 | 반대(0) 신고 |
2012.10.28 연중 제30주일 예레31,7-9 히브5,1-6 마르10,46ㄴ-52
‘베네딕도 수도 규칙 해설과 묵상’ 내용의 책 제목 ‘생명의 길’이란 글자를 보는 순간, 강론 제목은 ‘생명의 길’로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갈망과 관상, 선교라는 일련의 과정을 통해 생명의 길을 환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통상 사용하는 ‘+찬미 예수님!’이란 말마디보다 그리운 하느님을 찾아 기쁜 마음으로 주님의 집인 수도원을 찾습니다.
저희 요셉수도원이 자치 수도원의 승격이 결정되기 전 진지한 논의 과정에서 저는 날카로운 두 질문을 받았습니다.
저에겐 너무나 강렬한 체험이었기에 또 나눕니다.
오틸리엔 연합회엔 웬 지 맞지 않는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오틸리엔 연합회 안에 몸담고 있을 때 과연 편안할 수 있겠느냐?”
는 요지의 너무나 당연한 질문이었습니다.
강렬한 관상수도원의 분위기였던 듯 했습니다.
(나는 관상과 선교는 하나라고 생각한다).”
대답하고 보니 진리를 말했습니다. 관상과 선교는 함께 갑니다. 관상 없는 선교는 공허하고 선교 없는 관상은 맹목입니다. 좋은 관상가는 좋은 선교사일 수뿐이 없습니다.
not outside the monastery but the monastery itself where we invite guests and take care of them(우리 선교의 장은 수도
선교의 장이자 관상과 선교의 일치를 상징합니다.
생명의 길입니다.
바로 고독하고 외로운, 그러나 주님을 찾는 갈망의 인간 실존을 상징합니다. 우리보다 우리를 잘 아시는 주님이십니다. 당신을 찾는 갈망의 믿음이 있을 때 우리를 찾아오시는 주님이십니다.
무지하여 길을 벗어난 이들을 너그러이 대해 주시는 대사제 주 그리스도님이십니다.
‘너는 내 아들. 내가 오늘 너를 낳았노라.’ 하신 분, ‘너는 멜키체덱과 같이 영원한 사제다.’라 칭하신 바로 대사제 주 그리스도이십니다.
주님을 찾는 갈망의 믿음은 참 강렬했고 마침내 그의 영적 안테나에 주님이 포착되었습니다.
미사가 시작되자마자 간절한 기도, 기리에를 바칩니다.
바르티매오의 주님 찾는 열망의 불을 끌 수는 없었습니다. 연거푸 바치는 그의 간절한 기도에 마침내 예수님은 걸음을 멈추셨고 사람들은 지원군이 되어 그를 격려합니다.
용기를 내어 일어나 주님께 오십시오. 바로 미사 중 말씀의 전례, 성찬의 전례 안에서 갈망하던 주님을 만나게 되는 우리들입니다.
주님을 만날 때 해갈되는 주님 찾는 갈망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겉옷을 벗어 던지고 벌떡 일어나 예수님께 가는 바르티매오입니다.
길가에 앉아 있던 바르티매오가 주님을 만나는 순간 벌떡 일어납니다. 그대로 희망으로 부활하는 바르티매오를 상징합니다.
불안과 두려움, 근심과 걱정의 겉옷을 벗어던지고 벌떡 일어나 주님을 만나 기쁨과 평화의 옷을 갈아입게 됩니다.
제베대오의 두 아들 야고보와 요한에게 했던 똑같은 물음입니다. 이 둘의 대답을 기억할 것입니다.
저희를 하나는 스승님 오른쪽에, 하나는 왼쪽에 앉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바르티매오의 답은 전혀 달랐으니 그는 진정 구도자였습니다.
여기서 눈이 상징하는바 육안이 아닌 심안이요 영안입니다. 마음의 눈으로 잘 봐야 유혹에, 환상에, 착각에, 오해에 빠지지 않습니다.
보지 못하는 자 얼마나 많습니까?
그대로의 실재를, 하느님을, 이웃을, 자연을 직관하는 자입니다.
주님의 말씀과 성체의 은총으로 마음의 눈 활짝 열려 주님을 만나는 복된 관상체험을 합니다.
관상이 꽃이라면 선교는 열매입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주님과 함께 가서 복음을 전합시다.’라는 파견 말씀 같습니다.
가라고 명령하십니다.
바르티매오의 내적시야는 참 깊고 넓었을 것입니다.
시작되었음을 뜻합니다.
물이 있는 시냇가를 걷게 하고, 넘어지지 않도록 곧은길을 걷게 하리라.”
다시 당신을 따라 길을 나서게 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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