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순절은 천국의 문이 열리는 시기요, 예로부터
‘사순절에 세상을 떠나면 연옥을 거치지 않고 천당으로 바로 간다.’
하는 말이 있을 정도로 은총의 시기입니다.
사순절이 되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많은 결심을 하건만 그 결심이 다른 어느 때보다도
더 쉽게 깨어짐을 우리는 느끼고 체험을 합니다.
‘사순절 동안 내 입을 철저히 다스려야 되겠다.’ 하고 결심을 했건만
지나고 보면 다른 때보다도 입으로 지은 죄가 많았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순절동안은 ‘아무리 미운이가 나타나도 이해하고 용서하리라!’
지나고 보면 다른 때보다도 훨씬 더 미움과 분노 속에서 살았음을 우리들은 체험을 통해서 절감을 합니다.
사순절은 분명히 빛이 강한 시기입니다.
그러나 그 빛이 강하면 강할수록 주위에 있는 그림자는 훨씬 더 짙어지고 강해집니다.
따라서 사순절은 빛과 어두움이 공존하는 시기입니다.
사탄은 은총 쪽으로 나가려고 할 때마다 우리를 그대로 내버려두지를 않습니다.
사랑하는 교우들이 사십 일 동안 어둠속으로 들어가지 않고 빛 속에서 기쁨의 삶, 희생의 삶을
살 수 있도록 사제의 입을 통해서 복음말씀을 전해주고 계십니다.
오늘 복음에 네 가지의 화두인 묵상거리가 선명하게 우리들에게 전해집니다.
네 가지의 묵상테마는
첫 번째가 광야입니다.
두 번째가 사십일입니다.
세 번째가 회개입니다.
네 번째가 복음입니다.
첫 번째가 성령이 인도해서 광야로 나가셨다.
광야는 두 가지의 의미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느님과 인간이 만나는 장소, 은총의 장소입니다.
유명한 성인들, 수도원들은 지금도 광야에 존재합니다.
광야는 구약의 선지자들이 하느님을 만났던 거룩한 장소입니다.
은혜로운 땅입니다.
Holyland 입니다.
두 번째 의미는 유혹의 장소입니다.
시련의 장소입니다.
광야는 일교차가 심하고 물이 귀하기 때문에 들짐승들이나 살 수 있는 장소이지
사람의 약한 몸뚱아리가 견디기 어려운 장소입니다.
그래서 많은 유혹에 빠집니다.
유대인들도 사십 여 년 동안 광야를 헤맸을 때 우상에 빠졌고,
배고파서 못살겠다고 하느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저주했습니다.
광야는 영과 육을 가지고 있는 인간들이 은총을 받을 수도 있고 동시에
유혹에 떨어질 수도 있는 장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신성과 인성을 같이 가지고 계신 분이시기에
광야에서 극도의 유혹을 받으셨다고 되어있습니다.
비록 사람이 견디기 어려운 유혹의 장소이지만 우리의 영은 분명 육을 이깁니다.
영이 성장할 수 있는 아름다운 장소가 광야입니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구나 영적광야를 가지고 살아야 됩니다.
사제에게도 광야가 있어야 되고, 수도자에게도 광야가 있어야 되고
가정을 꾸리고 살아가는 여러분들도, 남편은 남편대로 아내는 아내대로
시어머니는 시어머니대로 자기만의 광야가 있어야 됩니다.
다른 어느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하느님과 나 사이에 그 어느것도 존재하지 않는 그런 광야가 있어야 됩니다.
주부들에게는 밥을 하고 살림을 하는 집이 광야가 될 수도 있고
직장일을 하는 직장인들에게는 그 직장이 광야가 될 수도 있고...
일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성당에 들러서 아무도 없는 감실 앞에 무릎을 꿇는
그 시간이 광야가 될 수도 있고,
파김치가 된 몸을 끌고 피정을 마치고 돌아온 사제에게는
그 늦은 시간에 십자가 앞에 무릎을 꿇는 모습이 광야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는 색깔과 모양은 다르다고 하더라도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기 나름대로 고독한 장소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현대인들, 요즘 신앙인들은 혼자 있는 것을 두려워합니다.
집에 들어오면 텔레비전을 먼저 켜야 되고, 라디오를 켜야 되고,
늘 소음 속에서 살아갑니다.
뭔가 조용하면 휴대폰을 들고 어디 누구한테라도 전화를 해야 됩니다.
나 혼자 있는 시간을 하느님과 나의 친밀한 만남의 시간으로 이끌지 못합니다.
그 시간에 촛불을 켜십시오.
아무도 없는 그 시간에 고상 앞에 촛불을 켜고 묵주를 들고 주님과 대화하십시오.
광야가 없다면 우리는 은총의 장소를 잃어버리게 됩니다.
우리의 몸은 은총의 장소가 될 수도 있고, 동시에 죄에 떨어지는 유혹의 원천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늘 명심하면서 유혹의 장소가 아니라 하느님을 만나는 은총의 장소로 바뀌어 나가야합니다.
두 번째 나오는 것이 사십일입니다.
성서에 사십일이 처음 등장하는 것이 노아의 방주이야기입니다.
하느님께서 인간들 하는 꼬라지가 하도 기가 막혀서 벌을 주시기로 결심을 하셨지요.
그래서 의롭게 살던 노아에게 지시를 합니다.
‘배를 만들어라.’
노아는 야훼가 일러주는 그 치수와 크기대로 마을 한복판에 배를 만듭니다.
사람들은 노아가 하는 것을 보고
‘미친놈! 어떻게 마을 한가운데서 배를 만들어? 아니 저걸 어디다 띄우려고 그래?’
그렇지만 노아는 묵묵히 배를 만들었고 모든 살아있는 들짐승 날짐승 한 쌍씩을 배에다 싣습니다.
문이 닫혀지고 난 다음에 하느님께서는 사십 주야를 비를 내립니다.
말이 사십일이지 솔직히 한동네 일주일만 주먹같은 비가 내리면 며칠 안가서
이 감곡성당도 물에 잠길 겁니다.
우리 인간들을 벌주려면 하느님 마음만 먹으면 쉽습니다.
사십 주야를 비를 내리니 온 세상이 다 잠기고 세상에는
노아의 방주 속에 들어가 있는 집짐승, 들짐승, 날짐승 한 쌍씩만이 살아있다.
성서에 나오는 첫 번째 사십일의 의미는 정화입니다.
심판을 의미합니다.
동시에 부활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이 주는 심판은 심판으로 끝나지만
하느님의 심판은 반드시 부활과 연관이 되어있습니다.
노아라고 하는 새로운 의미의 부활이 탄생한 겁니다.
성서에 나타나는 사십일의 두 번째 의미는 모세가 시나이 산에서
사십 일 동안 단식하면서 십계명이라고 하는 은총을 받습니다.
성서에 나오는 두 번째 40일의 의미는 은총을 받기위한 준비기간으로 등장합니다.
십계명이라고 하는 이 엄청난 은혜를 받기 위해서
모세는 사십 일 동안 단식을 하면서 산에서 준비했습니다.
주님께서 주시고자하는 은총을 우리들은 사순절 동안 받아야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어찌 여느 때와 똑같은 정신으로 똑같은 마음으로 살아가겠는가?
이런 준비를 하기위해서 우리는 분명히 다른 시기와는 달라야합니다.
생전 평일미사 안 나가던 사람들은 평일미사라도 나가야됩니다.
묵주기도 안하던 사람들은 묵주기도 시작해야 됩니다.
사십 일 동안 우리의 영과 육을 어지럽히는 텔레비전에 빠져있을 것이 아니라
성서를 펴들고 영적독서를 해야 됩니다.
이러한 몸과 마음의 준비가 있어야만
모세가 십계명이라고 하는 엄청난 은혜를 받았듯이 우리들도 분명히 받을 수 있습니다.
사십 일 동안 입을 다무십시오.
침묵가운데 사십시오.
모든 희생가운데 가장 큰 희생은 입을 다무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신약에 등장하는 사십일의 의미는 유혹과 시련을 뜻합니다.
유혹과 시련이 분명히 옵니다.
서두에 말씀드린 대로 사순절이 되면 시비 거는 인간이 더 있고, 사순절이 되면
성사거리가 더 많이 생기고, 사순절이 되면 죄에 더 많이 떨어지는 이유가 바로 유혹과 시련의 시기다.
사탄은 사순절이 되기 전에 동계훈련에 들어간다고 합니다.
체력을 단련하고 헬스클럽에 다니면서 사탄 나름대로
중무장을 하고 녹슨 칼도 갈고, 총도 점검하고, 사격장에 가서 사격연습도 하면서
사순절에 신자들의 이마에 재가 발라지면 이때부터 총공격에 들어갑니다.
성당을 공격하고, 구역 반을 공격하고, 레지오팀을 공격하고, 남편을 공격하고, 아내를 공격하여
지금이 은총의 시기라고 하는 것을 못 보게 합니다.
빛쪽으로 얼굴을 못 돌리게 합니다.
그래서 짜증과 분노와 분심 속에서 사순절을 지내게끔 총력을 다해서 우리의 영혼을 막아버립니다.
40일이라고 하는 것은 정화와 심판의 부활의 시기요,
은총을 받기위한 철저한 준비를 해야 하는 시기요, 그리고 유혹과 시련이 다가오는 시기입니다.
세 번째 회개입니다.
‘회개하여라!’
예비자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신자들이 가장 많이 듣는 단어가 회개라고 그럽니다.
그토록 많이 들었던 단어이지만 그 회개의 의미를 구구절절이 깨닫고
우리가 몇 번이나 참다운 회개를 하였던가!
회개에도 수많은 단추가 있습니다.
첫 단추가 제일 중요하지 않습니까?
우상숭배에 빠져 살았던 것을 회개하셔야 됩니다.
옛날 우상은 금송아지였지만 현대판 우상은 명확하게 말씀드리면
하느님보다 윗자리에 있는 것은 다 우상입니다.
여러분들, 솔직히 하느님 첫째 자리에 계십니까?
아닙니다.
어쩌다 급하면 가끔 꺼내보는 해결사!
필요하면 미사 때, 강론 때 잠깐 의식하다 말고 성당 나가면 다 잃어버리는 악세사리, 고급취미.....
여러분 머릿속에 하느님 없습니다.
연세가 많이 드신 분들, 죽을 날이 가까워 오신 분들
죽음의 밑바닥까지 경험했던 사람들은 첫째 자리로 갈 겁니다.
경부고속도로에서 차끼리 부딪혀서 차가 깡통처럼 찌그러졌습니다.
세상에 ~~ 놀랍게도 모든 사람이 다 죽었을 것이라고 했던 사람이
그 안에서 머리카락하나 다치지 않고 살아납니다. 그 인간이 바로 30년 냉담하던 인간이야.
그 인간, 병원에서 태어나자 마자 성당으로 성사보러 갔겠지요?
눈물, 콧물 흘리면서 “주님, 이 죗덩어리 인간 어디에다 쓰시려고 살려주셨습니까?
앞으로 내 인생 내 것이 아님을 절감하고 정말 겸손하게 하느님 첫 번째 자리에 두고 살겠습니다.”
고통의 밑바닥까지 내려가 보고 죽음을 체험했던 사람들은 하느님이 첫째자리에 계십니다.
젊은 엄마들에게 머리 굴리지 말고 바로 얘기하라고 그러면 첫 번째 자리가
남편이라고 그럴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남편은 이미 쓴물단물 다 빠졌습니다.
대개가 젊은 엄마들의 첫째자리는 자식입니다.
맞지요?
남편이 둘째나 셋째 자리에만 있어도 그 남편은 대단히 럭키한 남편입니다.
자식, 자기 건강, 취미생활, 남편.....
이렇게 따지다 보면 우리 주님은 당서열 10위에도 들까말까 합니다.
전국구 공천도 못 받습니다.
문제는 자식, 내 건강,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행복....
이 모든 것을 주시는 분은 하느님이신데 그 주시는 분은 저 밑바닥에다가 처박아놓고
달라고 하니 이게 응답이 오겠는가?
여러분들, 주님의 기도할 때 나를 위한 청원의 기도가 앞에 부분에 나옵니까? 뒷 부분에 나옵니까?
뒷부분에 나오지요?
앞부분에는 하느님에 대한 흠숭과 존경이 나옵니다.
뒤에 가서야 일용할 양식을 달라고 하고, 과거에 대한 죄를 용서해 달라고 하고,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것을 지켜달라는....다시 말하면 하느님께서 마땅히 있어야 할 자리에 계셔서 좌정하실 때
나머지는 질서가 잡힌다는 그 뜻입니다.
점집에 찾아다니는 것만이 우상이 아닙니다.
하루 종일 건강에 대한 생각으로부터 헤어나지 못한다면...
지 건강을 위해서는 오만 걸 다 먹고 오만 걸 다하면서도 늘 머릿속에 내 건강만 생각하는.....
하느님이 건강 때문에 밀려나 계십니다.
자식이 하느님을 밀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하느님보다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그것은 다 우상입니다.
이것 회개하라는 겁니다.
두 번째로 회개할 거리는 늘 다른 사람들에게 받은 상처만 끌어안고 살았지 한 번도
내가 다른 이에게 준 상처에 대해서 눈물로 절절히 회개 청해 본적이 없습니다.
다른 이가 나에게 찔러준 작은 가시만 보고도 우리는 복수할 것을 생각합니다.
내가 살면서 내 아내의 가슴에다가 대못을 박고 내 주변사람에게 등에다 칼을 찔러 집어넣는데도
지금도 그 사람은 그 대못을 못 빼고 피를 철철 흘리고 있는데도
지손에 찍힌 작은 상처만 바라보면서 한 번도 회개하지 않습니다.
어찌 회개거리가 이것뿐이겠습니까?
신자들은고백소에 들어가면서 많은 경우에 회개하는 것이 아니라 후회를 하다가 맙니다.
후회와 회개는 말장난이 아니라 하늘과 땅만큼의 차이가 있습니다.
후회라고 하는 것은 철저한 자기중심입니다.
지 자신이 죄에 떨어졌다고 하는 것이 자존심 상한다~~ 이겁니다.
‘이 등신아 왜 너 똑같은 죄에 떨어져?’
늘 자기중심으로 생각합니다.
대표적인 인간이 유다스였습니다.
예수님 팔아 먹을때도 자기중심적이었고 예수님 돌아가신 뒤에도 자기중심적으로 해석합니다.
‘나같은 놈은 구원 못 받아!’
구원받는지 아닌지는 자기 자신히 해석할 일이 아니지요.
성모님이 계신 다락방으로 찾아갔다면
다른 제자들이 유다스를 때려죽이려 하더라도 누가 막아섰겠습니까?
성모님이 끌어안았을 것입니다.
유다스는 예수님이 돌아가신 후에도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나는 자살밖에 없어.’
이게 바로 후회입니다.
후회는 늘 자기중심적입니다.
죄를 짓고 난 후에도 죄를 짓기 전까지도, 죄에 떨어지고 난 뒤에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회개는 철저하게 하느님 중심이어야 합니다.
'내가 그 죄에 떨어졌을 때 우리 주님이 얼마나 가슴 아프셨을까! '
'내가 남의 험담을 하고 돌아다닐 때 내 안에 계신 성령이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
‘내가 하느님을 멀리 할 때 성모님께서 나를 보시면서 얼마나 눈물로써 나를 위해 전구하셨을까!’
베드로사도는 세 번 하느님을 배반했지만 첫닭이 울기 전에 예수님의 그 동정어린 눈을 쳐다본 겁니다.
‘아, 저 분이 얼마나 기가 막혔으면... 내가 세 번이나 당신 모른다고 할 때 속 시원하게 욕이라도
해주셨더라면 내가 덜 가책을 받았을텐데....’
예수님의 그 연민어린 눈이 생각났지요.
회개는 철저히 하느님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고. 후회는 늘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40일 동안 여러분들은 두 가지의 관점에서
‘내가 우상숭배에 빠져 살지 않았던가!’
‘다른 이에게 상처준 것에 대해서 얼마나 회개했던가!’
너무 많이 회개를 확산시키지 말고 두 가지를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판공성사에 임하십시오.
사순절은 어느 본당이던지 분명히 성사가 있을 테니까
세 번째, 복음을 믿어라!
믿어라! 라고 하는 말 가운데에는 ‘전하라!’는 말도 같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믿다’! 고 하는 그 말 안에는 ‘외친다’고 하는 의미도 같이 들어가 있습니다.
회개하지 아니하는 자에게 복음은 쇠귀에 경읽기입니다.
회개하는 자는 스폰지에 물을 부으면 쫙쫙 스폰지가 받아들이듯이
마른 논바닥에 비가 떨어지면 빗물을 쫙쫙 받아들이듯이~~
어느 것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고 미사 때마다, 강론 때마다, 성서를 읽을 때마다
묵주신공 할 때 마다 꿀처럼 달고... 하루하루의 삶을 쓸데없는 곳에 시간을 소비하지 않습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주는 하느님의 은총은 복음을 믿게 되는 겁니다.
그리고 외치게 되는 겁니다.
오늘 사제의 입술을 통하여 40일의 첫 주일을 지내면서 네 가지의 화두를 드립니다.
나만의 광야가 과연 있었는가!
이제부터라도 하느님을 만나는 나의 광야를 만들자!
매년 돌아오는 사순절이지만, 주님 앞에 한 번도 떳떳한 적도 없었고 옳게 사순절을 보낸 적도 없는
나이지만 ...이번 사순절만큼은 어떤 시련과 유혹이 오더라도
나 자신을 정화시키고 다른 사람을 심판하던 그 손가락을
나 자신에게 향해서 자신을 철저히 심판하고 새로운 결심을 하는 시기라는 것
이제껏 성사생활을 하면서 후회만 했지 한 번도 하느님 중심으로 회개한 적이 없었기에
같은 죄에 쉽게 떨어졌다고 하는 것을 절감하면서
이번 성사는 후회가 아니라 머리 아플 때 진통제 먹듯이 찜찜하니까
그것 없애려고 후딱 들어갔다 나오는 그것이 아니라 정말로 회개를 해보자!
이제는 적극적인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전하는 사람으로 40일 동안
여러분들 새롭게 부활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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