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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제2주일 - 높은 산에 올라 보라! -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3-02-24 조회수383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오늘 말씀과 성령으로 우리들에게 오셔서 영적으로 변화시켜 주시고

치유시켜 주실것을 축원합니다.

 

우리들이 살아가면서 들어가서는 안 될 데가 몇 군데가 있습니다.

살다가 교도소는 가지 말아야 되겠지요?

또 정신병원 출입을 안하는 것이 여러 가지로 좋겠습니다.

 

어느 정신병동에 새로운 환자 한사람이 들어왔는데 증세는 과대망상증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병원에 들어오면서 문 입구에서 부터 뭐라고 떠들어 대고 다녔느냐?

“내가 하느님이 보내신 사신이다. 이놈들아 내 앞에 무릎을 꿇어라~~”

정신병원에 있는 사람들은 정말 하느님이 보낸 사람인 줄 알고 떨면서 무릎을 꿇었습니다.

이 사람이 일층을 휘젓고 다니다 이층으로 올라가서 거기서도 자신은 하느님의 사신이라고 떠들어댔습니다.

“이놈들아, 내가 하느님의 사신인데, 어떤 놈이 내 앞에서 무릎을 꿇지 않느냐~~”

사람들은 다 무릎을 꿇어주는 척 했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만 벽에 쓰~윽 기대어 서서 그 사람을 쳐다보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이 정신병자가 그 사람 앞에 가서

“이놈아, 내가 무섭지 않느냐, 나는 하느님이 보내신 사신이다.”

소리를 지르니까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있던 그 사람이 픽~~ 웃으며

“이놈아, 난 너 같은 놈 보낸 적 없다~~” ^___^

그래서 누가 더 높은 겁니까?

우리는 미쳐도 곱게 미쳐야 됩니다.


아무튼 뭔가에 미치는 게 좋은데 하느님께 깊이 빠져야 됩니다.

그런데 우리들이 구분이 되어야 하는 것 중 狂信者라고 하는 그런 표현이 있습니다.

이 광신자라고 하는 것은 聖靈에 취한 것이 아니라 惡靈에 취해서 하느님 모습을 비슷하게 보여줄 뿐이지 사실 그 내막에는 그 때문에 어둠이 있습니다.

이 광신자 앞에 서면 공포와 두려움이 느껴지고 반드시 분열을 일으킵니다.


그러나 성령 안에 미친 사람은 그 사람 옆에 있으면 기쁨, 그리고 행복이 느껴지며 사랑이 전염됩니다.

그 사람 곁에만 가도 평화가 느껴집니다.

이것이 악령과 성령에 미친 사람의 차이일 겁니다.


☆오늘 복음의 주제는 영적변화입니다.

그런데 영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단계가 있을 겁니다.

오늘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이 <어떤 마전장이도 그보다 더 희게 할 수 없을 정도로 희게 변했다> 라고 나와 있습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이 사제의 제의가 무슨 색깔입니까?

아마 타볼산에서의 예수님의 모습이 바로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요?

아름답지요?

이 제의는 어느 수녀님이 정성을 다해서 오랜 시간을 들여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아마 사제가 입은 이 옷보다 훨씬 더 희고 아름다우셨을 겁니다.

 

영적으로 변화되기 위해서는 분명히 단계가 있습니다.

세례 받고 무작정 세월이 흐른다고 아름답게 영적으로 변화되는 게 아닙니다.

세례 받고 뭘 찾아야 되느냐?

 

첫 번째, 높은 산을 찾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을 보면 예수님이 아름답게 변모하신 곳이 어디라고 표현되어 있습니까?

제자들을 데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셨다!

제가 유다 땅에 가서 실제로 예수님께서 올라가신 이스라엘의 타볼산이 얼마나 높길래 복음사가가 높은 산이라고 표현했을까! 하고 올라가 보았더니 우리나라의 뒷동산정도였습니다.

 

복음사가가 높은 산이라고 표현한 것은 장소의 개념이 아니라고 짐작이 됩니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예수님 변한 그곳이 바로 높은 산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변하려면 첫 번째 높은 산으로 기어올라 가야합니다.

높은 산은 바로 장소라기보다는 상태와 어떤 상황일겁니다.

피정이라고 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성지라고 하는 높은 산이 있습니다.


이 피정과 성지라고 하는 높은 산에 올라가면 분명 변화가 옵니다,

피정을 받다보면 또 성지에서 묵상을 하다 보면 안보이던 그 높은 산에 네 개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1) 기도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2) 봉헌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3) 나눔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4) 희생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서 우리들은  기도해야 됩니다.

봉헌해야 되고, 나누어야 되고 희생이 무엇인지 묵상하셔야 됩니다.

우리 신자들의 4대 의무가 기도, 봉헌, 희생, 나눔 다른 말로 친교, 희생이라고 합니다.

높은 산에 일단 올라가야만 이 네 개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본당에 피정이 있다

본당에서 어디 성지순례를 간다고 하면 열 일 제치고 쫓아다녀야 합니다.

피정 가서 하루 종일 앉아 있다 보면 내가 내 꼬라지(?)를 알게 됩니다.

말씀을 듣고 내 안이 환히 비춰집니다.


자기 혼자서 살고 주일이나 간신히 지키며 왔다갔다 하다보면 그래도 우리 성당에서 내가 중간정도는 될 것이다! 이렇게 착각하게 됩니다.

그러나 피정을 하면 내 영혼의 상태가 어떤지를 알게 됩니다.

네 가지 봉우리가 그야말로 민둥산이 되어 가지고 나무라고는 아무것도 심어지지

않아 비만 오면 산사태가 나는 그런 민둥산으로 있지 않은지....

일단 높은 산에 올라가 보면 이 네 봉우리를 발견해야 됩니다.

기도의 봉우리, 봉헌의 봉우리, 나눔의 봉우리, 희생의 봉우리를 보게 됩니다.


이렇게 높은 산으로 올라가면 두 번째 단계로 안 보이던 것이 보일 겁니다.

뭐가 보이겠습니까?

첫 번째, 상처가 보입니다.

두 번째, 내 악습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세 번째, 내가 얼마나 교만하다는 것이 드러나기 시작합니다.

네 번째, 영적으로 나태한 모습이 보입니다.

다시 말하면 영적으로 나태한 모습....오늘 제자들이 쿨쿨 졸고 있는 영적 나태함이 보입니다.

이렇게 부정적인 모습만 보이는 것이 아니라 아름다운 것도 같이 보입니다.

하느님께서 나에게 주신 탈렌트가 보입니다.

무엇보다도 망덕이 보입니다.

희망이 보입니다.

나 같은 죄인도 주님께서  사랑하고 계시다는 것을 깨닫고 희망을 갖고 그 언덕에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사랑하시는 하느님의 그 사랑에 감격해서 눈물을 흘리게 됩니다.


높은 산에 올라가면 안 보이던 것이 보인다고 그랬습니다.

여러분의 집에서는 절대 볼 수가 없습니다.

상처도 보이지 않고  악습이 보이지 않고 자신이 얼마나 교만한지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얼마나 영적으로 나태함에 빠져 있는지 보이지 않고

하느님께서 얼마나 나에게 좋은 탈렌트를 주셨는지조차도 모릅니다

그리고 하느님의 사랑이라고 하는 것도 못 느끼고 살아갑니다.


이렇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기 시작하면 저절로 오게 되는 것이 회개라고 하는

은총 가운데로 젖어들게 됩니다.


회개가 시작이 되면서 그때부터 바로 영적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 영적 변화는 본인이 원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납니다.

첫 번째 구원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우리 신자들이 특히 천주교 신자들이 세례 받고 나서 십년. 이십년...

수십년이 흘러도 왜 그렇게 소극적일까?

그것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개신교 신자들은 부흥회 며칠만 나갔다 와도 “나 구원 받았다~~” 확신이 있습니다.

그래서 집안 식구 끌고 교회 나갑니다.

천주교신자들은 3~40년 신자 생활을 해도 나 자신이 구원받았다는 확신이 없기 때문에 나 자신조차도 구원받았는지 내가 모르는 판국에 남까지 끌고 나가겠는가!


구원에 대한 확신이 없으면 모든 것이 소극적입니다.

전례에 임하는 자세도 그저 성사보기 귀찮으니까 주일 지켜야 되는 거고

봉헌도 소극적이 될 수밖에 없고, 전교하는 것도 매사에 소극적입니다.


그러나 영적 변화가 오기 시작하면 내가 구원받았다는 확신을 갖습니다.

그래서 공로라고 하는 것은 구원받기 위해서 공로 쌓는 것이 아니라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해 주셨으니 기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공로를 쌓는 그러한 구원에 대한 개념이 바뀌게 됩니다.


여러분들 구원받으셨습니까?

언제 받으셨습니까?

세례 때~~

나머지 80%는 대답을 안하시는 데 아직도 잘 모르십니까?

구원받으셨습니까?
세례  때 물과 성령으로 받고 그것도 모자라서 견진 때 성령七恩의 열매까지 받은 그야말로 개신교 신자들은 상상도 못할 영적 갑옷으로 온 몸을 두르고 은총으로 코팅이 되어 있는 존재들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걸 모르고 삽니다.

세례 때 구원받은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나 회개가 따라오면 제일먼저 처음 깨닫는 변화가

아, 주님이 나를 벌써 오래 전에 구원해 주셨구나! 확신을 갖게 되고 그 다음부터는 겁쟁이 열두 사도가 다락방에 숨어 있다가 성령을 받고 뛰쳐나가며 <주님 부활하셨다> 고 외쳤듯이 담대하게 복음을 전합니다.

그리고 십자가의 삶을 기쁘게 받아들입니다.


두 번째 따라오는 영적변화는 능력의 변화입니다.

교우여러분들

우리 신자들이 이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줄 수 있는 가장 큰 능력이 뭐겠습니까?

여러분들 세상 사람들 앞에 돈 자랑 하실 겁니까?

아니죠?

씨름선수 앞에서 힘자랑 하시겠습니까?

우리 천주교신자들이 이 세상을 향해서 보여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물은 바로 그 십자가를 전하는 능력입니다.

그래서 능력 중에 최대의 능력은 십자가를 담대하게 전하는 능력입니다.


200년 전에 천주교신자들이 외인들 앞에서 십자가를 그으면 그것은 곧 무엇을 의미했습니까?
순교를 의미했습니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 외인들 앞에서 십자가를 긋는다고 112가 출동하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신자들이 외인들 앞에서 밥을 먹으면서 하느님을 증거 하지 못합니다.

하루 세 번 삼종기도 하지 않습니다.

아침, 저녁 기도 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자들이 세상에 보여줄 수 있는 능력 가운데 가장 큰 능력은 십자가를 담대하게 전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이 세상에서 나를 부끄러이 여기면 나중에 나도 너를 모른 체 하겠다.>

사람들 앞에서 하느님을 증거하고 십자가를 담대하게 증거 하기를 것을 두려워하는 자들은 나중에 예수님의 얼굴을 마주 대할 생각을 하지 마십시오.

모든 능력 중에서 가장 큰 능력은 십자가의 능력입니다.

여러분의 집에 방마다 걸려 있는 그 십자가 자체가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생활을 하는 사람이 긋는 십자가는 힘이 있습니다.

<올바르게 성숙한  신앙생활을 하는 교우들의 집에 걸려 있는 십자가는 큰 힘이 있습니다>

마귀는 유리창 밖에서 그 십자가를 봅니다.

그러나 십자가마다 다 빛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이마에 세례 받을 때  뭐가 박힙니까?

인호가 박힙니다.

사제가 세례를 주실 때 이마에다가 기름으로 십자표를 긋습니다. 그 후에 솜으로 곧바로 닦았다 하더라도 그 인호는 지옥에 가도 지워지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는 사람은 신앙생활을 시작한지 2~30년 지났어도 지금도 여전히 빛이 납니다.


저는 미사를 드릴 때 이렇게 교우들의 이마를 쳐다봅니다.

지금 가린다고~~ 볼 것 다 봤는데~~

다른 사람 뒤에 숨는다고~~

미사 수건으로 가린다고~~ ^^

신앙생활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은 빛이 흐려가지고 빛이 나는지 안 나는지 구분이 안 갑니다.

성사 보고 회개하고 나온 사람의 이마에서는 얼마나 눈부신 빛이 비치는지 모릅니다.


저는 음식점에 들어가면 먼저 사람들의 손가락을 쭈~욱 봅니다.

그럼 우리 교우분들은 거의가 손에 묵주반지를 끼고 있습니다.

‘아, 이 형제는 우리 천주교 신자구나! 아마 직장동료들과 점심을 먹으러 나왔나 보다.’

저는 즉시 그 형제를 향해 화살기도를 쏩니다.

<주님, 당신의 아들이 지금 외인들 가운데 앉아 있습니다. 잠시 후에 음식이 나오면 담대하게 외인들 앞에서 십자 성호를 긋고 밥을 먹게 해 주십시오!‘

웬걸~~ 그 인간 밥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먹는 거야~~

참 그날따라 기도 발 안 받더구먼!


수십년 냉담했던 어느 형제가 성사를 보고 나서 차를 한 잔 마시면서 성사 보게 된 동기를 이야기하시는데 어느 식당에서 밥을 먹고 있는 데 40대 중반 된 어느 형제가 밥이 나오자 그 식당 안에 있는 사람이 다 들릴 정도로 큰 소리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주님, 은혜로이 내려 주신 이 음식과 저희에게 강복하소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밥 먹던 사람들이 밥을 먹다말고 그 사람을 다 쳐다 봤대요~~

그 앞에 있던 그 형제는 그 순간 충격을 받은겁니다

‘맞아, 나도 천주교신자였지...냉담한 햇수를 헤아려보니 30년이 가까워~~초등학교 때는 복사도 섰었고 중고등학교 때는 신학교까지 간다고 하면서 성서모임에도 나가던 나였는데~~ 간신히 관면 받고 나서는 성당을 멀리한지가 얼마나 되었나~~주님께서 나 같은 죄인을 십자성호 하나를 통해 회개시키는 구나! 그래, 주님 찾아가자!’

그 다음날 고백소 앞에서 무릎 꿇고 성사를 보았답니다.


우리가 식당에서/ 어떤 때는 차안에서/ 삼종기도하면서/ 또는 묵주를 들고 기도할 때/ 여러분 주변을 스쳐가는 사람들 중에는 냉담한지 수십년 된 사람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그 손에 든 묵주를 보면서 그날 밤 내내 아마 싸움이 일어날 겁니다.

‘그래, 이제 성당에 다시 가야지!’

그러나 어둠은 이렇게 유혹을 할 겁니다.

‘가면 안 된다....30년 쉬었으니 50년 될 때까지 버텨라~~’


이만큼 십자가의 능력은 상상을 초월합니다.

믿음을 가지고 자식들이 학교에 갈 때 이마에 십자표를 그어 주십시오!

그러면 그 날 아이는 보호가 됩니다.


제대로 된 천주교신자라면 깨어서 잠들기까지 적어도 자기 몸에 20번 이상 축성을 할 수 밖에 없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기도할 때 십자성호를 긋고

식사 전후 기도할 때 십자성호를 긋고

삼종기도하기 전후에 십자성호를 긋고

저녁기도, 잠자기 전 기도할 때 십 성호 긋고

화살기도 쏘면서 십자성호 긋고

적어도 제대로 된 천주교신자들은 하루에 20번 이상 지가 지 몸을 십자가로 중무장을 합니다.

어디 마귀가 건들겠습니까?


능력 중에서 가장 큰 능력은

가장 큰 변화는 십자가를 담대하게 전하는 영적변화입니다.


세 번째, 용서의 변화에 이르게 됩니다.

그 전 같으면 죽이고 싶도록 미웠던 사람이....

‘저 인간 용서하느니 차라리 내가 자살하는 것이 낫다!’

눈만 뜨면 저주하던 그 마음이 영적변화의 상태에 들어가면~~

회개를 통해서 성령의 도우심을 받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하얗게 쌓였던 눈이 며칠만 있으면 군데군데 흙덩이가 보이듯이 조금씩~~조금씩... 그 미움의 덩어리들이 떨어져나갑니다.

분명히 용서의 변화가 보입니다.


마지막으로 기쁨의 변화가 옵니다.

억지로 기쁜 척 하며 살았던 그 삶이 이제는 정말로 기쁠 수 있는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기쁨으로 변합니다.

<우울한 성인 없고 기쁜 마귀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위로부터 내려오는 기쁨을 즐겨 찾으려고 합니다

이제껏 기쁨은 기뻤던 것은 밑으로부터 올라오는 기쁨~~

움켜쥐는 기쁨~~

소유하는 기쁨~~

많이 갖는 기쁨이었지만~~

이제부터는 포기하는 기쁨을 얻게 됩니다.

진정으로 포기했을 때 얼마나 기쁜지~

그래서 몸 안에 암이 들어온다고 해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어차피 포기의 영성을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모든 영성가운데 가장 높은 영성은 이 포기의 영성이요~~

이 포기의 영성을  통해서만이 기쁨의 변화를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세례 받으시고 난 다음에 얼마나 변화가 되셨습니까?

예수님이 타볼산에서 변화되신 그 눈부신 변화만큼은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분명히 변화가 되어야 합니다,


☆변화되려면 우리는 일단 높은 산에 올라가야 이 네 개의 봉우리가 보인다고 했습니다.

기도의 봉우리가 보일 것이요.

봉헌의 봉우리가 보일 것이요

만남의 봉우리 다시 말하면 친교의 봉우리가 보일 것이요.

마지막으로 희생의 봉우리가 보입니다.


그 봉우리를 두루두루 다녀야만 안 보이던 것이 보이게 되는데

바로 내 악습이 보이고/ 내 상처가 보이고/  교만이 보이고

영적 나태함이 보이고/ 동시에 하느님께서 주시는 탈란트/ 가 보입니다.

또 하느님이 자비하시다고 하는 망덕이 보입니다.

그래서 저절로 회개라고 하는 단계에 오르게 되고 그 회개를 통하여 영적변화가 일어나고 그 영적변화의 내용은 구원에 대한 변화/ 능력의 변화/

용서의 변화/ 기쁨의 변화/를 주신다는 겁니다.


이 미사를 통해서도 우리는 변화되어 나가시면 됩니다.

성당에 들어오기 전보다는 무언가 변화되어 나가야 합니다.

말씀이 있고 성체가 있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여러분들이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께 청하십시오.

<주님, 세속 바다에서 헤매다가 다시 타볼산에 올라 왔습니다. 제 힘으로는 제 영혼에 묻은 때를 지울 길이 막막합니다.

주님, 사제의 입술을 통하여 샤워를 시켜 주시고 성체를 통해 새 인간으로 거듭나게 해 주시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이 미사를 기쁨 중에 봉헌하도록 합시다.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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