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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사순 제3주간 화요일 - 은혜의 보화로.....[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작성자박명옥 쪽지 캡슐 작성일2013-03-05 조회수351 추천수1 반대(0) 신고

                                                             
 

 
 
 
 
 

          배티 성지 김웅열 토마스 아퀴나스 신부님

 

      

       

 

 

†찬미예수님

사순절 거룩하게 잘 지내고 계십니까?

대답이 시원찮군요.


사순절, 은총의 시기이기에는 다른 어느 때보다도 내 악습이 기승을 부립니다.

악습을 치고 들어오는 사탄의 세력이 만만치 않게 공격을 해옵니다.

그래서 사순절은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영적으로 무장이 돼 있지 않으면

오히려 다른 어느 때보다도 영적으로 엉망진창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 그러한 시기입니다.


‘하늘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하는 라틴어 격언이 있습니다.

그 말은 뭐냐?

 ‘하늘아래 있는 것은 전부다 하느님 안에서 가장 단순한 것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 하는 그런 뜻일 겁니다.


강론의 특징은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늘 반복을 합니다.

그리고 자주 물어봅니다.

새로운 것을 많이 듣고 잊어버리는 거보다는

가장 중요한 것을 반복적으로 들어서 내 뼈 속 깊이 새겨두는 것

우리 신앙생활에 훨씬 도움이 될 겁니다.

 

왜 군인들이 똑같은 훈련을 그렇게 지루하게 매일 똑같이 하시는 줄을 알겁니다.

유사시에는 몸에 배인 그 동작이 그대로 튀어나옵니다.


마찬가지로 많은 것을 들어서 귀만 고급스럽게 살고

열매를 맺지 못하는 거 보다는

작은 거 하나라도 확실히 알고 열매를 맺어서

이 세상의 영적싸움에서 승리를 거두는 것

훨씬 더 우리들에게는 중요하다고 생각이 됩니다.


짝사랑의 좋은 점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씀을 드렸는데

첫 번째, 선택이 자유롭습니다.

그 선택이 속으로 사랑하는 한, 그 선택이 누구든지 간에 상관이 없습니다.


두 번째, 돈이 들지 않습니다.

무얼 갖다 주려고 할 때는 돈이 들지만

순수한 짝사랑은 돈이 들 리가 없습니다.


세 번째, 짝사랑의 장점은 퇴짜 맞을 염려가 없습니다.

내가 니 좋아한다는 것을 입으로 발설했을 때

상대편이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사랑이 이루어지지만 상대 쪽에서

‘너 참 언감생심..... 꿈도 야무지다. 어떻게 니가 감히 나를 넘봐!’

하고서는 퇴짜를 놓으면 그때는 죽느니 사느니 하면서 난리를 칩니다.


아무튼 속에 짝사랑으로 있을 때는 절대 퇴짜 맞을 염려가 없습니다.

이 인간의 짝사랑은 그 당시는 가슴이 아프지만 세월이 지나면

빙그레 웃음이 나게끔 좋은 추억거리가 됩니다.


그러나 하느님을 사랑하는 데는 절대 짝사랑이 통하질 않습니다.

인간의 짝사랑, 좋은 점이 선택이 자유롭다고 그랬습니다.

하느님은 여러 개 중에 한 가지 선택의 대상이 아닙니다.


오늘은 몸뚱아리, 내일은 돈

모레는 내 취미생활.....

그러다가 일주일에 한 번, 한 시간 몸뚱아리만 나와서

허깨비처럼 앉아있다 가는~~

그런 여러 가지 선택 중에 하나~~

다시 말하면 고상한 취미 생활 중에 하나가 하느님이 아닙니다.

나의 제일 첫 자리에 그분이 계셔야합니다.


인간의 짝사랑은 선택이 자유롭지만

하느님에게는 짝사랑이 통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목숨을 바치고 생명을 바치는 사랑을 원하고 계십니다.


인간의 짝사랑 두 번째 좋은 점은 돈이 안 든다고 그랬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돈이 드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도 내놔야 됩니다.

외아들을 하느님에게 바쳐야 될 때도 있습니다.

외동딸을 바쳐야 될 때가 있습니다.

오대독자, 육대독자가 신학교를 간다고 난리를 치면

아무리 열심한 부모도 앞이 캄캄해집니다.

하느님한테 처음에는 뺏기는 것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할 때는 돈이 문제가 안 됩니다.

내 모든 것을 바쳐야 될 때가 있습니다.


인간의 짝사랑 세 번째 좋은 점은 퇴짜 맞을 염려가 없다고 했지만

하느님을 사랑하는데 있어서

처음에는 우리가 하느님에게 아무런 정성을 드리지 않아도

하느님이 우리들에게 벌을 주시지 않는 것처럼 생각이 됩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은 내 마음대로 사랑하면 된다. 저분은 절대로 퇴짜를 놓으시지 않을 거다.>

이렇게 안심하고 하느님에게 함부로 할 때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무한히 기다리십니다.

기다리다.... 기다리다......

마지막 날에는 양과 염소를 왼쪽 오른쪽으로 갈라놓듯이

추수할 때 가라지를 뽑아서 불에 태우듯이

엄격한 개인 심판을 하게 됩니다.


내가 죄를 짓고도 그 자리에서 당장 벌을 받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이제 눈이 침침해지셔서 내가 하는 짓을 모르고 있구나!’

요렇게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만일 우리들이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을 받는다면

이 자리에 몸뚱아리 성할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속으로 음란한 생각을 할 때마다 이빨을 하나씩 뽑아버리십시오.

아마 우리 지금 입 벌리면 이빨 있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주일미사 빠질 때마다 발가락을 하나씩 하느님이 부러뜨린다고 생각해봅시다.

양말 벗어 보면 발가락 있는 사람 아무도 없을 겁니다.

다시 말 하면은 죄를 지을 때마다

그 자리에서 즉시 심판을 하시지 않는다고 해서

하느님이 우리의 죄를 모르시거나

귀가 잡수시거나 한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다 알고 계십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것은

니가 지금은 잡초처럼 생활하지만~~

니가 지금은 가라지이지만~~

이 세상의 식물세계에서는 아무리 세월이 지나도

잡초가 밀이될 가능성은 1프로로 없지만~~

영적인 세계에서는 잡초가 밀이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기다리시는 겁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짝사랑만하는 이 생활은 기초가 없는 삶입니다.

하느님은 짝사랑의 대상이 아닙니다.


하느님을 온전히 사랑하기 위해서는 첫 단추를 잘 열어야 되는데

그 첫 단추가 뭐냐?

회개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

고린토 후서 4장 7절에

<하느님께서는 질그릇 같은 우리 안에다가 보화를 담아주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질그릇입니다.


여러분 앞에 있는 사제도 약하기 이를 데 없는 질그릇이고

우리 모두는 들었다가 탁 놓으면

와장창하고 깨질 수밖에 없는 질그릇입니다.

쇠그릇이 아니라 질그릇입니다.

그 질그릇 안에 무엇을 담고 사느냐에 따라 보물함도 되고~~

그 안에 썩은 보물이 들어가면

요강도 되고 똥통도 될 수 있다! 이겁니다.


더러운 냄새가 풀풀 나는 내 악습을~~

내 욕심을~~

교만을·~

우상숭배를~~

그 질그릇 안에 있는 걸 끄집어내서 영적보화를 채우는 것이 바로 회개입니다.


많은 이들이 회개가 무엇인지 그 첫 단추를 모릅니다.

회개란 철저한 방향전환을 말합니다.

회개는 다리만 하느님께로 가는 것이 아니라 머리까지 돌려야 됩니다.

회두! 

다리가 하는 것은 머리에서 지시를 합니다.

손이 움직이는 것도 머리에서 지시를 합니다.


롯의 아내는 하느님 쪽을 향해서 소돔과 고모라를 탈출하다가

머리가 뒤로 돌아 갔습니다.

그래서 소금 기둥으로 변하고 맙니다.


회개는 몸만이 아니라

머리까지 철저하게 하느님께로 돌려야 되는 것입니다.


많은 교우들이 후회로 시작해서 후회로 끝나는 것을

회개로 착각을 합니다.

처음의 시작은 후회지만 그 열매는 회개로 갑니다.


후회와 회개가 뭐가 다르겠습니까?

후회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는 겁니다.


자기가 죄지은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한 겁니다.

아이구! 이 바보야! 너 저 고백소에 들어가는 것도 지겹지 않니?

챙피하지도 않니?

어떻게 그 죄짓고 삼일도 안돼서 또 죄에 떨어지니?

늘 자기중심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같은 악습이 반복이 됩니다.


후회의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유다스였습니다.

유다스는 단 한번밖에 죄를 짓지 않았지만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이었습니다.


유다스는 우리가 알다시피 돈을 맡아보는 총무였습니다.

없는 돈에 열두 식구를 먹여 살려야 되니까 힘들었겠지요?

그 때 유혹이 들어옵니다.

“니 선생을 은전 삼십 냥에 넘기면 아무튼 내가 돈을 주겠다.”

은전 삼십 냥이면 장정 열두 명이서 몇 달을 먹을 수 있는

빵을 살 수 있는 값이었고 노예한사람을 사고파는 값이었습니다.

‘그래 넘기자. 우리 선생님이 자기 한 몸, 그렇게 호락호락 넘어갈 분이 아니다.

 아마 끌려가는 척 하시다가 한순간에 요술을 부려가지고 그놈들을 전부다 쓰러트리고 우리 앞에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돈은 돈대로 들어오고 선생님은 선생님대로 살아오실 것이다.’

자기가 생각하는 예수님의 상을 그대로 실천한 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빌라도 앞에서

사형선고를 받고, 조롱을 받고 십자가의 길을 가십니다.

유다스는 ‘지금쯤 뭔가 보이실 때가 됐는데 왜 뭔가 아무 일도 안하실까?

지금쯤 뭔가 능력을 보이실 때가 됐는데.......’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 위에서 비참하게 돌아가십니다.

‘내 계획은 저것이 아니였는데.....내가 아무리 돈에 환장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내 선생을 은전 삼십 냥에 팔아먹을 만큼 그렇게 파렴치한 놈은 아닌데.......나는 더 이상 살 자격이 없어....다른 제자들이 있는 다락방으로 가봐야 나를 죽이려고 덤벼들거야.’

유다스는 죄를 지은 후에도 끝까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합니다.

‘나 같은 놈은 절대로 용서 못 받아!’


마귀라고 하는 놈은 우리들이 죄를 짓고 나면 늘 그런 식으로 유혹을 합니다.

‘너 참 뻔뻔하다. 어떻게 그 죄를 짓고 나서도 그 안에 들어가서 몇 마디 지껄이면은 그 죄가 사해지는 줄 아니? 넌 참 뻔뻔한 놈이다. 너 거기 들어가 봐야 니 죄 사해지지 않어. 너 차라리 자살을 해라. 그 인생으로 사느니.....’

마귀는 죄를 짓기 전서부터도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하고 죄를 짓고 난 후에도 끝까지 하느님 쪽으로 못 가게끔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하게 합니다.

이게 바로 후회입니다.


회개는 하느님 중심 쪽으로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누구를 생각해야하느냐?

하느님을 생각해야 됩니다.

성모님을 생각해야 되고 내안에 계신 성령을 생각해야 됩니다.

‘내가 죄를 지을 때마다 내 안에 성령이 얼마나 마음 아프셨을까?’

‘내가 헛된 소문을 퍼뜨릴 때마다 성모님께서 얼마나 눈물을 흘리셨을까?’

다시 말하면 회개는 하느님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겁니다.


베드로는 세 번이나 배반을 했지만~~

첫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배반했지만~~

세 번이나 ‘나는 저 양반을 모릅니다.’ 했지만

맨 마지막에 예수님의 그 눈을 본 겁니다.


사람이 너무너무 배신감을 느낄 때는 욕도 안 나옵니다.

예수님께서는 ‘내 수제자다.’했던 그놈에게 배신을 세 번 당하십니다.

나중에 예수님은 그냥 연민어린 눈으로 그냥 베드로를 쳐다봤습니다.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의 눈을 보고

‘저분이 얼마나 가슴이 아프시면

나한테 ‘이 못된 놈아!’ 하고 말 한마디 못하실까?’

그때, 땅을 치고 통곡을 한 겁니다.


회개는 철저히 하느님 중심이어야 됩니다.

회개는 적극적인 회개거리를 우리는 많이 해야 됩니다.


주일 빠지고,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간음하고.....

이런 것들은 우리들이 죄를 짓고 난 다음에 쉽게 죄라고 하는 거 느낍니다.

이것은 소극적인 회개거립니다.

조금만 생각해도 죄라고 하는 것이 우리는 알아지는 것!


그러나 적극적인 회개거리

이것이 바로 천국을 가로막는데,,,,,

적극적인 회개거리는 뭡니까?

죄가 아닌 것 같은데, 실제로는 하느님 보실 때 큰 죄인 것들이 많습니다.

예를 들면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거

부자와 나자로의 비유에 나옵니다.

부자가 지옥에 간 이유는 나자로에게 악행을 행했기 때문이 아니라

적극적인 선을 못 베풀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하면 남한테 해꼬지 안하고

나도 넘 한테 아쉬운 소리 안하고 착하게 살다죽으면 천당 가겠지.....

그런 것 가지고 천당못갑니다.

성서에 ‘착하게 살면 천당 간다.’라는 말은 한마디도 없습니다.

적극적인 선을 행해야 됩니다.

주변에 있는 사람에게 적극적인 책임감을 느껴야 됩니다.


이것이 바로 회개거립니다.

첫 번째,적극적인 사랑을 실천하지 않는 거...

두 번째, 옳은 일인 줄 알면서 행치 않는 거....


야고보 4장 17절

<사람이 제가 마땅히 해야 할 착한 일을 알면서도 하지 않으면 그것이 곧 죄가 됩니다>.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행치 않는 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정의인줄 알면서도 두려움 때문에 말을 못하는 거....

이런 것들도 회개거립니다.


세 번째로는 영적질투가 있습니다.

누가 잘되는 것은 보지를 못합니다.

항상 영적으로 늘 분노에 차있고 이 질투에 부글부글 끓습니다.


근데 많은 교우들이 지금 얘기한 이런 것들은 별로 죄가 아닌 걸로 압니다.

그래서 늘상하는 얘기가 뭐겠습니까?

고백소 안에서....뭐 뻔 한 얘기겠죠?

예수님은 고백소에서 그 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닙니다.

주일 몇 번 빠졌느냐?

그것이 아니라.....그 소리도 해야 되지만....

내 가장 가까운 이웃에게 얼마나 사랑을 적극적으로 실천했느냐?

옳은 일인 줄 알면서도...

니가 두려움 때문에 행치 않은 것이 뭐가 있느냐?

그리고 니가 얼마나 영적으로 질투 가운데 살아가느냐?

죄가 아닌 것 같지만~~

하느님의 밝은 빛 앞에 서면~~

엄청나게 큰 죄들이 많습니다.


우리들은 죄의 불감증 환자로 지낼 때가 많습니다.

하얀 종이에 까만 점이 딱 찍히면 눈에 띕니다.

그러나 자꾸 까만 점이 계속 찍히다 보면.....

나중에는 이것이 까만 종이에 하얀 점이 찍혀있는 건지 구분이 안갑니다.

다시 말하면 처음에 죄를 지을 때는 가슴이 두근대지만~~

자꾸 죄를 짓다보면 불감증에 걸립니다.

못 느낍니다!


마귀가 즐겨 이용하는 것이

회개 못하게 하는 이 영적인 불감증입니다.


회개를 통해서 빈 그릇이 되면

우리의 질그릇 안에 오만 추잡한 것을 다 회개를 통해서 끄집어내서

빈 그릇이 된 것을 그대로 놔두면...

마태복음 12장 45절에 나오는 대로 오히려 쫓겨나갔던 마귀가 집안이

깨끗해진 것을 알고 일곱 마귀를 다시 끌어다가 집어넣는다고 그랬습니다.


마귀에게 점령당하게 하지 않기 위해서는

회개를 통해서 깨끗해진 그 질그릇, 그 빈자리에

하느님의 은혜로 채워야 됩니다.


성서에서는 뭘 가지고 채우라고 가르쳐주고 계십니까?

사랑과 기쁨, 평화와 인내와 친절, 선행과 진실과 온유와 절제로 채워야 됩니다.

이러한 열매를 채워놓지 않으면~~

아무리 회개한다 하더라도~~

성사를 보고 고백소 안에서 눈물을 펑펑 흘린다 하더라도~~

이러한 열매가 내안에 채워져 있지 않으면

나가자마자 똑같은 죄에 떨어집니다.


오늘 주님께서는 몇 번을 반복해서 우리들에게 강한 경고를 하십니다.

<회개치 않으면 망하리라!>

아멘!

 

 

    http://cafe.daum.net/thomas0714 주님의 느티나무 카페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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