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북부 피카르디(Picardie)의 코르비(Corbie)에 사는 목수의 딸인
성녀 콜레타는 1381년 1월 13일에 태어나 니콜레트(Nicolette)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으나, 흔히 콜레트(Colette)로 불렀다.
17세 때 천애의 고아가 된 그녀는 자신의 유산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 뒤에 작은 형제회 3회원이 되었으며,
코르비에서 독수자로 생활하였다.
21세 때부터 성녀 콜레타는
코르비의 원장이 빌려 준 은둔소에서 홀로 살았는데,
그곳에서 아시시(Assisi)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의 환시를 보았다.
이때 성 프란치스코는 '가난한 부인회' (클라라 수녀회)가
엄격하던 그들의 원 회칙에 따라 살도록 인도하라는 명을 내렸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이미 그녀의 성덕과 영적 지혜가 널리 알려지고 있었다.
그녀는 클라라 수녀회의 개혁을 지시하는 환시에 응답하려고
자신의 은둔소를 떠나,
영적 지도자인 앙리 드 바움(Henry de Baume) 신부의 권고에 따라
교황청 책임자인 베드로 드 루나(Petrus de Luna)를 면담하기 위하여
1406년에 니스(Nice)로 갔다.
베드로 드 루나 역시 깊은 감명을 받고,
그녀가 클라라 수녀회에 입회하는 것을 허락하고
기존 수도원의 개혁과 새로운 수도원 설립을 위임하였다.
처음에 그녀는 피카르디와 사부아(Savoie)의 수녀들로부터
심한 반대를 받았으나,
1410년부터 앙리 드 바움 신부의 지지를 얻어서
개혁 사업은 점차 성공하기 시작하였다.
그녀는 프랑스와 플랑드르(Flandre) 지역 내에
엄격한 규칙을 지키는 수도원을 17개나 세웠고,
르 퓌 앙 블레(Le Puy en Velay)의 한 곳을 포함하여
기존의 다른 수도원을 개혁하였다.
성녀 콜레타는 무슨 일을 수행하도록 훈련받거나 준비한 일은 없었지만,
믿음의 힘과 성덕 그리고 아무도 거스르지 못하는 결정에 따라
일을 올바르게 성취하였다.
그녀는 자주 탈혼에 빠졌고 고난에 대한 환시를 보았으며,
벨기에의 겐트(Gent) 수도원에서 자신이 죽으리라는 예언을 하였다.
성녀 콜레타의 개혁 클라라 수녀회는
프랑스뿐만 아니라 오늘날에는 세계 도처에 산재해 있다.
그녀는 1740년 1월 23일 시복되었고,
1807년 5월 24일 교황 비오 7세(Pius VII)에 의해 시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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